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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 있는 바퀴벌레
[상상사전] ‘대상화’
2019년 05월 09일 (목) 21:41:54 김지연 PD huse7@hanmail.net
   
▲ 김지연 PD

낮잠을 잔 게 실수였다. 뺨의 솜털을 건드리는 미묘한 공기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누워있는 내 발끝 쪽에서 우리 집 고양이 토리가 보였다. 천장으로 머리를 쳐들고 집중하고 있는 토리의 시선은 분명 내 머리 뒤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사각지대라 보이지 않았고 순간 안도했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용감한 작은 사자가 사냥에 나설 거다. 사냥에 성공해서 전리품을 뜯어먹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진다. 까슬까슬한 혀가 내 팔을, 다리를 핥을 때마다 사랑스러운 주둥이 주위에서 검은 기운을 느껴야 할 테니까.

나는 숨죽인 채 침대에서 내려와 곁눈질로 물체를 확인했다. 까맣고 윤기 나는 표면이 보이는 거 같았다. 바로 옆 책장에 다가가 무기를 찾는다. 가장 좋은 것은 두꺼운 전공 제본 책. 원본이 아니니 아까울 것 없고 넓은 면적에 두꺼우니 사정거리와 위력에도 부족할 게 없다. 위치를 확인하고 내려치기 위해 뒤로 돈 순간, 빨빨거리며 벽과 천장 틈 사이를 기어가던 바퀴벌레가 멈춘다. 정적이 흐른다. 움직일 수가 없다. 내가 바퀴벌레를 쳐다본 순간 바퀴벌레가 멈춘 것이다. 바퀴벌레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퀴벌레가 나를! 팔다리에 털이 삐쭉 섰다. 니체가 말했던가, 내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고. 저 바퀴벌레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 평소에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었던 존재가 나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 pixabay

영화감독은 종종 ‘사람이 아닌’ 것의 시점을 빌려서 관객에게 이질감과 공포를 전달한다. 가장 고전적이고 대표적인 사례가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버즈아이뷰’(bird’s-eye-view, 조감도)다. 그는 영화 ‘새’에서 이 앵글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사람들이 새 떼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 연결된 장면은 허공에서(사실은 새의 시각에서) 그런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광경이었다.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 공포는 어디서 온 걸까? 늘 보던 앵글의 화면이 아니기 때문에 주는 낯섦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이름에 담겨있듯, 영화 속에서 난데없이 인간을 공격하는 새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영화의 맥락을 고려해봐야 한다. 그것은 평소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었던 존재가 나를 바라볼 때 내가 ‘대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두려움이다. 나와 대상 사이의 위계가 사라지고 그 둘이 다를 것 없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 때 주는 공포와 섬뜩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대상화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것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 수가 있습니까?”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물음은 왜 미국 대통령이 자연을 대상화해야 했는지를 알려준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메리카 땅을 갖기 위해 그 땅은 사고 팔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새를 그저 하늘에 날아다니는, 나와는 상관없는 자연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유해조수를 사냥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터이다. 새들이 왜 도시의 유해조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해를 끼치는 대상이 결국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생각 저편으로 밀어버린 채 말이다.

인간의 ‘본다’는 행위에 담긴 권력은 인간의 우위를 증명하는 기제로 작용해왔다. 적으로든 소유물로든 동정의 대상으로든 우리는 보이는 것을 ‘대상화’한다. 그 덕분에 지구 생명체 중 최초로,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을 부릴 수 있었다. 20세기 근대의 아(我)와 비아(非我)라는 이분법적 흑백 안경 덕분에, 겁도 없이 말이다. 이제는 그 안경을 벗어야 한다. 그래야 흑백 안경이 가리고 있던 21세기, 있는 그대로 컬러 화면을 마주할 수 있다. 아니, 하루 빨리 벗어야 한다. 인간에게 자연이 돌이킬 수 없게 망가져, 안경을 벗고도 여전히 흑백인 지구를 보려는 게 아니라면……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강도림 기자

[김지연 PD]
단비뉴스 미디어콘텐츠부, 기획탐사팀 김지연입니다.
연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서 가장 높이 날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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