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가정의 달’ 단상

▲ 정소희 PD

늙으신 어머니 나에게
이 노래 가르쳐 주실 때,
두 눈에 눈물이 곱게 맺혔었네.
이제 내 어린 딸에게
이 노래 들려주노라니
그을린 두 뺨 위에 아 한없이
눈물 흘러내리네.

드보르작이 어린 두 딸을 차례로 떠나 보낸 뒤 작곡한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의 가사다. 그는 첫 딸이 죽었을 때 성모 마리아에게 매달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찢어지는 슬픔을 함께하며 위안을 구했다. 1년 반 뒤, 둘째 딸이 죽자 이번엔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유아 사망이 흔하던 시절, 드보르작은 캄캄한 절망 속에서 따뜻한 어머니를 회상하며 슬픔을 이겨내려 했고 이 노래를 지었다. 처연하면서도 간혹 희망이 엿보이지만 슬프고 쓸쓸한 선율이다. 그는 이어 셋째인 아들마저 잃어버린다. 나는 이 노래의 ‘나’를 90년생 정소희로 설정해 듣곤 한다. ‘노래를 가르쳐 주는 어머니’는 나의 엄마 56년생 신동식 씨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내게는 딸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딸에게는 ‘이 노래’를 가르치지 않을 거라고.

엄마는 나이 서른넷에 늦둥이로 나를 낳았다. 위로 언니가 둘 있어서, 내 탄생은 기쁘지만은 않았다. 엄마 시어머니는 명절마다 ‘아들을 못 낳았다’며 엄마를 구박했고, 손녀에게 ‘여자는 밥을 조금만 먹으라’고 다그쳤다. 엄마도 어린 시절부터 내게 ‘목소리를 다듬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소리를 ‘노래처럼’ 자주 들려주었다. 엄마가 들려준 노래는 외할머니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엄마의 시어머니로부터 구전된 것이기도 하다. 막내도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수술실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는 아빠도 엄마가 그 노래를 배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빠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타고난 기질이나 적성과 관계없이 ‘여자다움’을 요구하거나, 사회적 역할보다는 ‘집안의 역할’에 만족하라거나 하는 노래는 내 엄마뿐 아니라 동시대 모든 여자가 따라 불러야 했던 노래였다.

▲ 타고난 기질이나 적성과 관계없이 ‘여자다움’을 요구하거나, 사회적 역할보다는 ‘집안의 역할’에 만족하라거나 하는 노래는 내 엄마뿐 아니라 동시대 모든 여자가 따라 불러야 했던 노래였다. ⓒ pixabay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출간 직후부터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김지영의 일생’은 ‘한국의 모든 여성의 일생’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여성은 ‘his’tory라는 주류 역사에서 소외되고, 저평가된 재생산 노동과 임금차별을 감내해 온 ‘소수자’다. 여성이 겪는 차별은 초역사적이며, 초지역적이라 옆 나라 일본에서도 이 소설은 ‘한류 문학’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정권 초기, ‘페미니스트 정부’라 부르며 남녀동수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치,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이제 성차별이 종식되는 시대가 우리나라에 도래할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까?

엄마에게 ‘20대로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과 미소로 여행작가를 하겠노라고 답했다. 다시 돌아가면 가족과 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도 했다. 말을 끝내고 내 표정을 살피더니 ‘그래도 너희를 얻은 건 축복이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엄마는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자신을 편안하게 만든다고 했다. 똑같이 일하고도 아빠의 식사를 차리는 것, 자식을 기르는 부담을 도맡는 것과 늙은 시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엄마의 굴레지만, 엄마는 굴레가 편하다고 했다. 엄마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으나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엄마는 말로는 ‘저쪽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만, 몸은 ‘편한 이쪽에’ 두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서 노래를 배우지 않았다. 교육과 환경의 영향으로 나는 ‘나만의 노래를 지어 부르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각자의 엄마가 알려준 노래를 이어 부르지 않으려는 젊은 여성들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다. 엄마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구석은 나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십중팔구 나는 엄마보다 편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계절의 여왕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5월 초부터 시작된 연휴로 도로와 정거장, 공항이 북적인다. 그 언저리에 ‘어버이날’도 있다. 엄마를 만나면 아무래도 이 말을 미리 해야 할 것 같다. 모든 여성은 ‘자신만의 방’과 ‘자신만의 노래’가 필요하다고. 이 말을 듣고 엄마는 웃어 줄까, 성을 낼까?


편집 : 황진우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