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강도림 기자

‘싱가포르에는 모기가 없다.’ 싱가포르의 강력한 부패척결 의지와 높은 국가 청렴도를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이 업자들의 집요한 설계∙구조 변경 로비와 뇌물공세를 뿌리치고 하수도 구조를 미세하게 경사지도록 만들어 물이 괴지 않게 해서 모기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정부가 ‘모기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모기가 많은 곳인데, 이 말이 사실처럼 들릴 정도로 싱가포르의 부패 대응은 단호하다.

싱가포르가 195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부터 청렴국가의 이미지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독립 후 건국과정의 혼란기는 물론 그후에도 한동안 부패가 만연했다. 1986년 리콴유 총리의 ‘절친’으로 건국 때부터 리 총리를 보좌해온 치엥완 국가개발부장관이 친구인 건설업자로부터 국유지를 개발할 수 있게 도와준 대가로 40만 싱가포르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포착됐다. 지금 환율로 환산하면 3억4천여만원쯤 되는 돈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정치자금’ 운운하면서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다.

총리 직속 부패수사 전담기구인 부패행위조사국(CPIB, 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이 치엥완 수사에 나서면서 총리에게 보고를 했다. 치엥완은 ‘절친’인 리콴유 총리에게 억울함을 들어 달라며 만나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총리로부터 돌아온 답은 “CPIB가 조사중인 피의자이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CPIB의 수사를 받던 치엥완은 ‘자살’이란 방식으로 자신의 부패혐의에 책임을 졌다. 그는 리 총리에게 자기 행동을 후회하며 모든 책임을 지고 그 대가를 치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1965년에는 리 총리의 오른팔로 불리던 탄키아칸 장관이 사법처리됐고, 1976년에는 리 총리의 친구이던 위툰분 국무장관이 부패혐의로 CPIB에 의해 기소됐다. 이처럼 총리에게만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CPIB가 최고 권력자의 ‘오른팔’과 ‘절친’들을 권력의 측근이라며 봐주는 것없이 법대로 처벌한 것이 오늘날 싱가포르를 아시아권 청렴도 1위 국가로 만든 초석이 됐다.

CPIB가 부패청산에 성공한 요인으로는 서너 가지 요소가 꼽힌다. 정부기관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충분한 인력∙예산 지원, 철저한 수사권 보장과 공정한 법집행 등이 그것이다. 그런 제도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수사대상에 성역이 없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핵심적인 성공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최고 권력자의 오른팔과 ‘절친’을 가차없이 체포해 수사하고 드러난 범죄혐의를 법대로 처벌하니 나머지 비리나 부패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 것이다.

▲ 싱가포르는 부패행위조사국(CPIB)을 통해 아시아권 청렴도 1위 국가로 거듭났다. ⓒ CPIB 페이스북

이런 싱가포르의 성공 사례를 본떠 추진중인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은 지금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공수처가 CPIB처럼 부패청산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그 수사대상에 제한이 없어야 한다. 특히 최고권력자의 주변과 측근들 비리를 성역없이 수사하고 법대로 처벌해야 부패청산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최고권력자는 대통령이고 그 최고권력의 측근들은 여당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중에 있다. 또 권력을 배경으로 해서 권력형 비리나 부패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대통령 친인척이다. 공수처 설치를 강력하게 추진중인 문재인 대통령도 <문재인의 운명>에서 “대통령 주변 측근과 친인척, 청와대 주변 권력형 비리 위험 인물이 기본 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월 열린 ‘청와대 국정원, 검찰, 경찰개혁 전략회의’에서도 “첫 번째 대상은 대통령과 대통령의 친인척 특수관계자, 그 다음에 청와대 권력자들, 자연히 권력이 있는 국회의원도 대상으로 포함되고, 판사, 검사도 대상으로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얼마 전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원내 4당이 합의한 공수처 법안은 최고권력자 주변 인사들에 관한 수사권은 부여하되 기소권은 없는 것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4당의 합의안은 ‘신설되는 공수처에는 기소권을 제외한 수사권과 영장청구권,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관해 법원에 재정신청을 할 권한을 부여한다, 다만 공수처가 수사한 사건 중 판사,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이 기소 대상에 포함돼 있는 경우에는 공수처에 기소권을 부여하는 등 실질적 견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고 돼 있다. 쉽게 정리하면 최고권력 측근과 주변 인사들이 포함돼 있는 장차관과 국회의원, 대통령 친인척은 공수처가 수사만 하고 기소는 검찰이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반면 공수처가 수사를 해서 기소까지 할 수 있는 대상은 판사,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간부 뿐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아니라 ‘법조비리수사처’가 돼버렸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수사기관이 수사를 하는 이유는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범죄자 처벌은 법원에서 판사가 법률에 따라 유무죄 여부를 판정해서 처벌을 결정한다. 이런 사법체계에서 수사기관이 피의자가 범죄혐의가 있으니 처벌해 달라고 법원에 청구하는 것을 기소라고 한다. 따라서 수사기관에 기소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있으니 처벌해 달라는 청구를 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공수처 설치 배경과 관련해 ‘검찰의 권력 눈치를 보는 수사를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도 4당의 합의안은 공수처가 수사는 해놓고 처벌을 요구할지 말지는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검찰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수사는 하게 하면서 기소권은 주지 않겠다는 것은 처벌 여부는 검찰에 맡겨 경우에 따라서는 없던 일로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검찰이 권력 주변 수사를 하면서 부패나 비리를 밝혀 내기보다는 권력자들에게 죄가 없다는 면죄부를 주는 일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는 국민의 의구심을 깊게 할 수밖에 없다. 지금같은 흐름으로는 결국 ‘공수처(公搜處)’가 ‘空手處’가 될지 모른다는 국민들의 우려를 잘 새기길 바랄 뿐이다.


편집 : 조현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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