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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놀이’라는 행복
[상상사전] ‘일’
2018년 08월 01일 (수) 17:55:46 박경난 PD pkn226@naver.com
   
▲ 박경난 PD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만년필 두 자루를 썼는데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원하지 않을 때는 잉크가 뚝뚝 떨어지고 필요할 때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만년필은 한 자루에 10엔 내외였다. 300엔짜리 최고급 만년필보다는 싸지만 1전짜리 펜이나 3전짜리 붓의 몇 백 배에 이르는 고가 필기구였다. 비싼 가격에도 만년필은 하루 백 자루씩 팔렸다. 나쓰메 소세키는 만년필 수요가 느는 추세를 사치품 애호라기보다는 필수품이 됐기 때문이라고 봤다. 잉크가 다할 때마다 잉크병 속에 펜을 적셔야 하는 귀찮음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도 만년필 두 자루가 있는데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만년필보다 싸고 편한 펜이 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필수품이 아닌 사치품 또는 기호품이 됐다. 내 만년필은 1~2만 원대 싼 제품이라 자랑할 만한 건 아니다. 그저 특별한 날 편지를 쓰거나 멋들어진 글씨가 당길 때 귀찮음을 감수하고 꺼내드는 기호품이다. 만년필로 사각사각 글을 쓰면 과제할 때는 한 쪽 채우기도 힘들었던 게 한 장, 두 장 술술 써진다. 글이 아니라도 아무 의미 없이 선을 그으며 한껏 놀고 나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 나쓰메 소세키가 살던 시절 필수품이던 만년필이 지금은 기호품이 됐다. 원고를 쓸 때 불편하게 느껴지던 만년필이지만, 이제는 만년필 관리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만년필이 일이 아닌 놀이의 수단이 된 것이다. ⓒ pixabay

똑같이 만년필로 글을 썼는데 나쓰메 소세키는 불만이었고 나는 행복했다. 만년필 질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시 만년필은 제일 편한 필기구였고 지금은 다소 수고를 요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풍요로움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고, 불행은 전념해야 할 만한 일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가로서 글을 써야 하는 상황 때문에 풍요로움을 방해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만년필을 탓하며 소설 <피안 지나기까지>를 다시 펜에 잉크를 찍어 집필했다. 반면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만족스러운 글씨가 나올 때까지 수백 번 반복해 쓰며 놀았다. 러셀의 불행 개념을 빌리면 내게 만년필은 열의를 가지고 전념할 수 있는 놀이였기에 행복했다.

최근 연예인 김생민이 짠돌이 이미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김생민의 영수증>과 <짠내투어>에서 그에 대한 반응이 사뭇 다르다.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를 위해 영수증을 분석하고 무엇이든 아끼는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대단하다고 칭송한다. 반면 아무리 적은 돈이라지만 숙소든 식사든 너무 아끼기만 하는 그의 여행에는 불만이 쏟아진다. 전자는 절약이 스스로 정한 일의 수단이지만, 후자는 ‘적은 금액에 맞춰야 한다’는 외부에서 주어진 일의 조건이다. ‘논다’는 여행의 본질은 사라졌다. 반면 박나래나 정준영은 음식이나 관광 등 한가지만은 제대로 즐기자는 콘셉트로 호응을 얻었다.

글씨 하나를 써도, 여행을 간다 해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행복하다. 예능 <윤식당>,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힐링 콘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장사, 요리, 상담 등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을 놀이로 즐겼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했다면 사람들은 대리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사는 김태리를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감옥 같은 고시원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김태리(혜원 역)는 고시에 떨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직접 키운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행복을 느낀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

나쓰메 소세키는 결국 만년필을 좋아하게 된다. 그는 문필가가 만년필을 이해하지 못하면 민망한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고백한다. 글이라는 주어진 일에 더해 이해해야 하는 ‘일’이 된 만년필을 아니꼽게 바라본 게 이해된다. 하지만 그 후 친구가 선물해준 노트에 글을 써보니 기분 좋게 쓱쓱 잘 써졌다고 한다.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면 같은 것도 다시 보인다.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일’이 아닌, 놀이라고 생각하자. 입시, 입사, 결혼이라는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불행할 거란 괜한 걱정을 버리자. 마음속 감옥을 탈출하자. 일을 즐기다 보면 행복은 어느새 와 있지 않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임형준 기자

[박경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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