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여가’

▲ 조현아 PD

“전쟁과 평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일과 여가를 이렇게 비유하였다. 우리의 삶은 일과 여가로 나뉘어진다. 전쟁 같은 삶 속에서 찰나의 ‘평화’인 휴식을 얻으려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이란 가사처럼 주5일 빡빡하게 일하고 잠깐 숨 돌리는 듯한 금요일을 보내면, 토•일은 스치듯 사라지고 어느새 또 월요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평화를 위한 도구여야 하듯이 ‘일’도 ‘여가’를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여가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 속의 여가나 놀이가 그만큼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한국 사회는 여가에 익숙한 사회가 아니다. <콜린스사전>은 여가를 ‘일하지 않으면서 휴식하거나 즐기기 위한 활동’이라고 정의하는 반면, 국어사전에서는 ‘일이 없어 남는 시간’이라 말한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라 하는데, 사전적 정의에서부터 우리가 인식하는 여가가 어떤 것인지 드러난다. 사실 ‘여가’는 한국경제의 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장시간 노동’을 뒷받침하는 주변부 요소였다. 70-80년대 주 평균 51.6시간 일하던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이 다시 일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가져야 했던 노동을 위한 회복의 시간. 한국인은 지금도 한 해 2069시간, OECD에서 두 번째로 일을 많이 한다. 과로가 일상이 된 ‘과로사회’에서 제대로 된 여가가 자리할 틈이 없었다.

‘평화’(여가)를 잃어버린 삶 속에 ‘전쟁’ 같은 일상만 남았다. 한국 직장인의 85%는 ‘번아웃(Burnout)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월요병’이란 말이 뉴스를 포함한 곳곳에서 등장한다. 충분히 쉬지 못했기에 즐겁게 생산적으로 일할 수 없고, 일상은 점점 더 피폐해진다. 인간에게 노동과 여가는 대립성과 상호의존성을 동시에 지닌 불가분의 관계다. 한쪽이 제대로 된 의미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선 다른 쪽 역시 제대로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충만한 쉼이 없는 삶에서는 노동의 기쁨이 충만한 일도 없다.

우리가 취하는 짧은 휴식마저도 획일적인 때가 많다. 스마트폰, TV 드라마, SNS에 올리기 위한 사진 찍기… <한겨레> 구본권 기자의 지적처럼 획일화, 모방화, 과시화한 우리의 여가문화는 ‘정말 우리가 쉬는 법을 모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여가 시간이 절대 부족한 탓도 있지만 주어진 쉼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는 측면도 크다는 것이다. <몰입>의 저자 칙센트 미하이는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여가가 아무리 생겨도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대체 우리에게는 어떤 ‘쉼’이 필요한 걸까? 가수 크러쉬(crush)가 우승한 ‘멍 때리기 대회’는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규칙은 간단하다. 야외 공원에 모인 수많은 참가자 중 가장 오래 ‘멍 때리는’ 사람이 우승한다. ‘멍 때리는’ 행동은 우리 뇌의 DMN(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과 관련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뇌가 사고, 기억, 판단, 인지가 아닌 아무 목적 없이 ‘멍 때리고’ 있을 때 활성화하는 영역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아성찰, 사회성과 감정, 창의성의 영역이다. 좀처럼 ‘멍 때리기 힘든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 고유의 영역이 활성화한다는 점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 삶의 의미를 사유하는 사색과 성찰, 잠시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여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schole다. ⓒ pixabay

‘한 낮의 벤치’ 같은 여가를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대 그리스어로 Schole(스콜레)란 ‘한가함’,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유시간’, ‘여가’를 뜻한다. 한가한 상태의 자유로움은 학문을 위한 탐구, 자아성찰, 토론으로 이어져 오늘날 학교(School)의 어원이 되었다. 어떠한 의무감에서 벗어나 한낮의 벤치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한적함, 조용함을 누리는 쉼. 그 자유시간 속 충만한 ‘내적 평화’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일상의 수많은 의미를 사유하는 ‘관조적인 삶’. 끝없는 ‘doing’에서 벗어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여가에서 창조적인 영감을 얻는지 ‘being’에 관한 질문을 가만히 나에게 던져본다. 어쩌면 그 벤치 위에서 우리는 일의 수단이 아닌 삶의 목적으로서 여가, 진짜 평화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양영전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