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삶’

▲ 박강수

이소라는 일곱 번째 음반을 내면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음반 이름은 표지로, 수록곡 이름은 표지 뒷면에 손수 그린 13개 그림으로 갈음했다. 아홉 번째 트랙은 다음과 같은 노랫말로 시작한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렸네.’ 나는 이 구절을 접하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오래된 철학 명제를 떠올렸다. 태어나버린 나(주어)와 세상에 의해 규정된 나(이름) 사이 극복할 수 없는 거리. 후렴에서 그녀는 ‘당연한 고독’과 ‘평범한 불행’이 이로부터 비롯한다고 노래한다.

언어란 이름을 짓는 일이다. 이름(기호)과 이름의 주인(지시물)이 일치할 수 있다면 애초 우리는 서로를 오해할 필요가 없다. 기호만으로 대상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유토피아의 풍경을 추정할 수 있는 텍스트로 성경이 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아담은 아버지의 피조물에 하나씩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작명 실력이 어찌나 출중한지 기호와 지시물이 구분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담이 지은 사슴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단번에 사슴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쟤는 OO이야”라는 설명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이를 ‘아담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류는 낙원에서 추방되고 바벨탑이 무너지면서 그런 능력을 모조리 망실했다. 이후로 줄곧 언어와 대상 사이, 또는 언어와 언어 사이 간극은 인류의 숙명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오스트리아 철학자 마이농은 “언어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지시물이 곧 언어의 의미다”라고 답했다. 듣기에 따라 매우 당연한 소리를 했을 때 반문은 명약관화했다. 언어는 지시물을 온전히 지칭할 수 있을까? ‘사과’는 그렇다 치더라도 ‘영혼’이나 ‘유니콘’ 같은 말은 어떤가? 지시물의 존재 여부를 몰라도 이 말들은 뜻을 갖지 않는가?

▲ 언어와 대상 사이, 또는 언어와 언어 사이 간극은 인류의 숙명이었다. ⓒ flickr

대답은 어렵지 않다. ‘영혼’이나 ‘유니콘’이 실재하는지 몰라도 어쨌든 우리의 상상, 즉 관념 속 존재를 지시하는 말로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 그만이다. 진짜 문제는 ‘둥근 사각형’, ‘결혼한 총각’처럼 언어로는 성립하지만 논리로는 아예 존재할 수 없는 대상들이다. 원이면서 동시에 사각형인 형상, 결혼을 했으나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 이런 개념들은 머릿속에도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지시물이 없어도 언어는 의미를 가지므로 언어철학은 ‘지시이론’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논리적 대안을 찾는 과정은 험난했다.

언어의 의미는 지시에 있지 않다. 너의 이름은 너를 의미하지 못한다. 이름이 지어지기 전에 너는 존재했으므로. 이 거리감은 태어남의 필연적 결과이기에 ‘온전하게 나로 불릴 수 없는 고독’은 당연하고 ‘정확하게 지칭될 수 없어 이해받지 못하는 불행’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소라는 ‘당연한 고독과 평범한 불행에도 살아가야 한다’고 노래했다. 지은 적 없는 이름으로 불리고 알지 못하는 나와 살아가야 하는 그녀는 자신이 만든 노래에 이름을 짓지 않았다. 언어와 존재의 한계를 직시하는 이 예술가의 윤리적 태도에 나는 위로받는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11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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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박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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