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부모였기에 나와 남동생은 할머니 손에 자랐다. 몸이 고달픈 탓인지 할머니는 내가 부엌에 들어가고 남동생도 돌볼 것을 기대했다. 그럴 때마다 하신 말은 “해 버릇해야 돼”였다. 내 방 청소는 물론 설거지도 내 몫이었다. 손을 데어가며 교복 셔츠도 다려 입었다.어린 내게 일을 시켰다고 투정부리는 게 아니다. 내 몫은 스스로 하는 게 맞다. 하지만 “해 버릇해야 돼”라는 말은 내게만 해당됐다. 거기에는 “넌 계집애니까”가 빠져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어릴 때는 아빠의 밥상을, 더 큰 뒤에는 동생의 밥상까지 차려줘야 했으
‘자존감을 높이는 글쓰기’를 주제로 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에서 이문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전반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한국 사회에서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로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고 서열을 매기는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 한 번으로 60만 수험생을 일렬로 줄 세우고, 힘들게 들어간 회사에서는 연봉으로 서열을 매긴다. 개인은 자존감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고 승자만 살아남는 구조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우리 사회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최초로 받는 질문이 뭘까요
1. 구병모,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문학과 지성사소설의 쾌감은 현실을 비트는 데서 온다. 2015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구병모의 단편소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도무지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심한’ 이야기를 담았다. 어찌 보면 오컬트(Occult: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초자연적 현상) 문학 같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 속 기괴한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간강사, 콜센터 상담원, 경비원 등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작가는
지난봄, 제천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두 달 만에 만난 아빠에게는 앞니 하나가 빠져있었다. 다시 해 넣기 위해 뺀 것이긴 해도 이빨 하나에 딴 사람이 된 듯했다. 그날은 마침 아빠의 생일이라 가족들이 함께 간 노래방에서 아빠는 윤수일의 ‘아파트’와 편승엽의 ‘찬찬찬’을 잇달아 불렀다. 빈틈없고 근엄했던 아빠가 신나게 노래하고 영화 <영구와 땡칠이>의 영구처럼 앞니가 빠진 채 밝게 웃으니 모두가 따라 웃을 수밖에.그날 살갑게 다가오는 아빠를 더욱 실감한 것은 내가 아는 아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정표현에 서툰 사람이었다. 스
수십 개의 전선에도 각자의 길이 있었다. 박성준(18·가명)군의 손이 미로처럼 얽힌 전기선들을 헤집었다. 회로 단자를 빼고 끼우며 전류의 길을 뚫거나 끊었다.서울로봇고등학교 학생들이 장비마다 붙어 앉아 회로와 씨름했다. 학교 건물 5층 시스템통합실에서 안전 시스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전사고 방지 장치인 자동 멈춤 회로를 직접 설계해보는 과정이었다. “교사가 일부러 고장내고 해당 부분을 찾으라고 하면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뒤에도 교실에 남아 문제를 해결하려 애쓴다”고 여수경 마이스터 기획부장은 전했다. 3학년 박성준 군은 멋쩍
임금의 자리를 이을 아들이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충격적 사실 때문일까? 사도세자만큼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된 역사적 인물도 드물다. 1956년 영화 <사도세자>부터 2014년 서울방송(SBS)의 <비밀의 문-의궤살인사건>(이하 비밀의 문), 2015년 영화 <사도>에 이르기까지 사도세자가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는 10편이 넘는다. 작년 9월 22일부터 12월 9일까지 방송된 24부작 드라마 <비밀의 문>과 올해 9월 16일 개봉한 영화 <사도>의 서사구조를 비교 분석했다. 영화 촬영 후반부에 드라마가 방송되기 시작해 <사도>와
‘농경지가 협소하고 논보다 밭의 비율이 높아 과거 주민들은 식량난을 면치 못했다.’사전에서 ‘괴산군’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다. 그랬던 괴산이 어느새 국내 유기농의 메카로 떠올라 한살림, 흙살림, 아이쿱생협 등 협동조합의 본거지가 됐다. 농민들이 부족한 생산량을 메우고자 선택한 것은 비료와 농약이 아니었던 셈이다. 좁은 농토는 우리나라 농민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다. 대중이 괴산 유기농의 성공에 관심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지난달 18일 개막한 ‘2015 괴산세계유기농산업엑스포’는 유기농 분야의 세계 최초 엑
“정치는 2500년 전 시작됐는데,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사람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비판한 사람들 기록만 남았습니다. 왜 민주주의를 지지한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왜 현대 민주주의는 철학자의 ‘기획’이나 지식인의 ‘이론적 뒷받침’ 없이 이뤄졌을까요?”‘보통사람’이 이룬 민주주의 펠로폰네소스전쟁 참패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몰락한 뒤 민주주의는 사라지는 듯했다. 13세기 무렵 아리스토텔레스 책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민주주의란 말이 다시 등장했지만 이를 지지하는 철학자는 없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플라톤의 <국가>도 공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안타깝게 헤어졌던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 분)는 속편 <비포 선셋>에서 9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다. 프랑스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이 서점은 스콧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영미문학의 큰 별이 된 작가들이 파리 여행 중 숙식하며 서점 일을 돕고 글을 썼던 장소로 유명하다. 대전시 중구 대흥동에 있는 도어북스(door books)는 ‘한국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지향하는 서점이다. 책 제작부터 유통까지 작가가
“우리 조상들에게 농사는 축제였습니다. ‘꽂아보세, 꽂아보세.’ 노래를 부르며 값진 땀을 흘렸죠.”한 시간 남짓한 관람 시간은 한국 전통농업의 재기발랄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지난 3월 26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문제세미나’ 참가자들이 서울 중구 새문안로에 있는 농업박물관(관장 김재균)을 찾았다. 전시 해설을 맡은 이제구 학예사는 우리 조상들에게 농사는 축제였음을 줄곧 강조했다. 농사는 어떻게 축제가 됐을까? 김매기와 마을 축제의 ‘융합’, 두레“우리나라 농경 문화의 핵심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