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양특강]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주제 ②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정치는 2500년 전 시작됐는데,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사람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비판한 사람들 기록만 남았습니다. 왜 민주주의를 지지한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왜 현대 민주주의는 철학자의 ‘기획’이나 지식인의 ‘이론적 뒷받침’ 없이 이뤄졌을까요?”

‘보통사람’이 이룬 민주주의 

펠로폰네소스전쟁 참패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몰락한 뒤 민주주의는 사라지는 듯했다. 13세기 무렵 아리스토텔레스 책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민주주의란 말이 다시 등장했지만 이를 지지하는 철학자는 없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플라톤의 <국가>도 공화정을 의미하는 리퍼블릭(Republic)을 말했지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를 말하지는 않았다. 철학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주의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이야기하며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대한 특강을 시작했다.

“2500년 전 민주주의는 ‘보통사람’들이 이룬 변화였습니다. 물론 당시 보통사람은 교육받은 중산층이겠죠. 글자보다 구전에 익숙했던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앞세우기보다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주장하고 실천했습니다.”

▲ 고대 아테네의 중심지인 아크로폴리스 근처에 아고라가 있었다. 시민들은 시장인 아고라에서 자유롭게 정치적 견해를 나누고, 동료 시민들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 Flickr

리퍼블릭은 ‘왕정이 아닌 체제’의 좁은 의미로 굳어졌지만 데모크라시는 보통사람들의 주장과 실천으로 서서히 하나의 체제를 이루게 됐다. 박 대표는 “민주주의는 위로부터 ‘기획’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요구’로 자리 잡았다”며 “조금 시끄럽더라도 보통 사람들에게 평등한 참여의 권리를 주는 게 민주주의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정당이 정부가 되는 현대 민주주의 

박 대표는 “많은 사람이 옛날 민주주의에 근거해 현대 민주주의를 판단하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옛날 민주주의와 많이 다르다”며 차이를 이야기했다. 아테네 시민은 누구든 공직에 오를 수 있었다. 공직을 맡고 싶은 시민은 추첨을 통해 주요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는 500인 위원회나 행정위원회 등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시민의 공직 진출을 보장하기 위해 임기를 제한하고 연임을 불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시민 자격을 가진 이들은 소수였고, 이는 곧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였다. 여성과 이주민, 노예는 시민이 아니었으며, 여가시간이 없고 무기를 가질 만큼 부유하지 못한 이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박 대표는 “지금처럼 다원화한 사회에서 과거 방식으로 현대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국가가 아닌 도시공동체에 바탕을 둔 아테네 민주주의는 인구가 적어 시민들이 동질적이었다. 행정은 매우 단순했고 정당개념도 없어 시민들은 당원이 아닌 개인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반면, 현대사회는 자기 이익과 권리를 추구하는 ‘시민사회’ 영역이 있어, 정치와 분리된 사회라는 개념이 없던 아테네와는 다르다. 박 대표는 “현대 민주주의만이 ‘개인의 권리에 기초한 체제’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선거 때마다 당명 바꾸면 책임정치 어려워 

박 대표는 옛날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차이를 정당의 존재 유무에서 찾았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를 ‘어제의 야당이 오늘의 여당이 될 수 있는 체제’로 정의하며, 여당이 계속 집권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당이 정부가 되는 건 현대 민주주의의 장점이지만 처음부터 정당이 정부를 운영한 건 아니었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이 현대 의회정치의 기초를 만들었지만, 군주가 수상과 의원을 정하고 국왕 영향력 아래 있는 궁정파 세력이 내각을 움직인 시기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명예혁명 이후 200여년이 지난 1867년에야 선거법을 개정해 선거에서 이긴 정당이 일정 기간 통치권을 갖는 변화를 이뤄냈다. 박 대표는 다수당이 정부가 되기 시작한 이 시기가 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 제임스 2세는 의회의 지원을 받아 유혈사태 없이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의회 중심의 입헌주의를 채택한다. © Flickr

이런 현대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하는 건 책임정치 구현이다. 책임정치는 지난 통치의 결과를 시민들이 투표라는 ‘종이짱돌’로 심판하는 것과 같다. 우리처럼 정당 이름이 가려진 이명박정부나 박근혜정부라는 말을 쓰거나, 정당들이 선거 때마다 당명을 바꿔 출마하는 왜곡된 정치풍토는 책임정치를 어렵게 한다. 박 대표는 정당 이름이 자주 바뀌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마찬가지로 박근혜정부가 아닌 ‘새누리당정부’라고 정확히 부를 때 책임정치가 가능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강조했다.

다방면에서 유능해져야 하는 정당

박 대표는 “현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만으로 지배되는 체제가 아니”라며 “민주적 과정으로 다수가 정한 결정이라도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게 현대 민주주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정신에 부합하는지를 면밀히 따지고, 시장에서는 민주적 결정이 시장경제 원리에 벗어나거나 재산권 조항과 충돌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현대 민주주의는 좋은 헌법학자와 제구실하는 헌법재판소도 필요하고, 공정하고 자율적인 시장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는 민주적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만이 운영한다고 되는 게 절대 아니에요. 그런 건 기본이고, 조직적•제도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현대 민주주의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시민사회와 정치, 국가가 서로 다른 원칙으로 움직이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박 대표가 주목하는 건 실력을 갖춘 정당이다. 그는 다원주의 체제를 운영할 조직적 능력과 지식, 안목을 정당이 갖추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혼란에 빠질 거라고 우려했다.

“무엇보다 정부를 운영할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정부는 어마어마하게 큰 조직이에요. 정당은 대통령만 배출하면 다가 아니라 공무원들 사회에서 존중도 받고 그들을 이끌 만한 능력을 키워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절대 혼자 운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당이라는 팀이 관료들과 손발을 맞추고 공공정책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없으면 곤란하죠.”

▲ 박상훈 대표는 정당이 정부를 운영할 능력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 서혜미

두 개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한 현대 민주주의

박 대표는 거대한 국가 관료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시장권력을 현대 민주주가 맞닥뜨린 두 개의 도전으로 지목했다. 이런 ‘거대 조직 시대’에 평등한 시민권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다. 그는 자본주의보다 불평등한 체제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강조했다.

“삼성의 가족 지분을 다 합해야 전체 주식의 4%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전체를 통제하는 건 총수일가입니다. 이 정도는 약과예요. 미국의 대표적인 가족기업 월마트는 가족들 재산이 미국 하위 30% 계층의 재산을 합친 것과 같습니다. 옛날 부자들도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오로지 자본주의를 위해 실천하고 있습니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함께 관료제 또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국가는 수많은 절차와 제도로 운영되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건 관료제다. 거대한 관료조직은 막대한 공적 자산과 법률, 군사 등을 관리하며 사회를 움직인다. 박 대표는 이런 관료제야말로 인간이 만든 가장 놀라운 조직이라고 말했다.

“옛날 제국주의 국가들이 폭력적으로 식민지 사람들 재산을 빼앗아 갔지만, 오늘날 세무 관료들이 우리 재산을 상세히 파악하고 요구하는 것만큼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득세법이 등장하고, 소득조사를 할 수 있는 조세제도가 갖춰진 뒤 관료들이 조선 민중의 돈을 효과적으로 빼앗아 가기 시작했어요. 이런 게 관료제예요.”

거대한 국가 관료제와 ‘1원 1표’ 불평등 원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래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본주의와 관료제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 안전과 평화 등의 가치를 추구하려면 결국 시민권력이 조직돼야 한다. 박 대표는 아무리 자유로운 개인이라도 집단으로 조직되고 투표할 수 없다면 평등한 시민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당을 꽃피우자

박 대표는 다시 한번 정당의 구실에 주목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시민권력의 조직체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정당으로 조직된 시민의 의지가 단단하고, 정당 간 경쟁이 사회를 더 넓게 대표할수록, 행정권력과 경제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권력의 기반은 견고해진다. 이럴 때 시민권력은 균형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교육받은 중산층들의 열정이 지나치게 강한 사회입니다. 중산층의 특징이 뭘까요? 조직과 리더십을 싫어합니다. 달리 말해, 정치를 싫어하는 겁니다. 개별적으로 개념시민이 되고 깨어있는 걸 선호할 뿐 조직화에 따른 비용을 감당하는 걸 누구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시민이 조직되지 않으면 변화는 어렵습니다.”

박 대표가 눈여겨보는 건 정당이 시민사회에 뿌리내린 독일의 모습이다. 독일 사민당은 선거 때 카페에 선거운동사무소를 마련해 시민들과 어울렸다. 그는 시민들의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은 우리 정당들의 선거운동사무소는 정당과 시민사회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독일은 대학축제도 우리처럼 총학생회가 아닌 정당 학생위원회가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정도로 정당이 사회 곳곳에 발을 뻗고 있다는 거다. 아이들 교재에는 ‘정당 만들기’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 지난 8월, 독일사민당은 창당 150주년을 맞이했다. 시민들이 창당을 기념해 거리로 나올만큼, 독일 정당은 일상생활에 자리잡았다. © Flickr

“이를테면 ‘숙제하기 싫은 당’을 만들자고 합니다. 선생님들 채점하기 편하게 일률적으로 숙제 내지 말라는 걸 아이들이 요구합니다. 직접 강령도 써보고 정책도 만들어 보는데, 상당히 재미있고 참여하기도 쉬워요.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문제가 있을 때 시민들은 정치조직을 만들 권리가 있다는 걸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겁니다.”

정당이 발달하지 못한 민주주의에서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이익과 열정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정당이 권력 다툼과 전략적 계산에 흔들리는 일이 많지만, 민주주의 가치를 실천하려면 정당 중심의 정치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박 대표는 주장했다. 그는 민주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을 조직하는 건 우리 민주주의의 과제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정치권력은 실패하기도 하고, 부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회구조에서 그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학기 <사회교양특강>은 조준상 박인수 홍기빈 김동춘 구갑우 전중환 박상훈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