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투표를 막는 장벽] ① 선거 정보 찾아 삼만리

* 이 기사는 단비뉴스에서 우수 콘텐츠로 선정돼 2025년 8월 단비언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기사 순서>

① 친절한 방법 대신 간편한 방법 택한 대선 후보들

② 제발 선거 정보를 통역해주세요

③ 투표소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

④ 참청권의 그늘에 볕이 들려면

지난달 3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대한민국 헌법 제24조는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 보장한다. 이번 대선에서도 3500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 하지만 헌법적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장애인 유권자들이다. 

보건복지부가 2023년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제20대 대선 당시 장애인 투표율은 82.1%였다. 언뜻 보기에 높아 보이지만, 조사 대상은 8000명에 불과했다. 현재 장애 유권자 수는 253만 명으로 추정된다. 조한진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난달 5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표본 수가 적어 장애인 투표율을 대표하기 어렵고,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상당수 장애인이 투표장에 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단비뉴스는 시각, 청각, 발달, 신체장애 유권자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참여 경험을 취재했다. 이들은 선거 정보를 얻고, 투표소를 찾아가고, 기표하는 행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의 투표 참여를 막은 장벽은 무엇이었을까?

지나치게 촘촘한 점자 공보물

충청북도 청주시에 사는 시각장애인 박건우(29) 씨는 평소 뉴스를 자주 챙겨본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집으로 배달된 점자형 공보물을 통해 후보자들의 공약을 확인했다. 박 씨는 누구를 뽑을지 결심이 설 때까지 공보물을 꼼꼼히 읽는 편이다. 

5월 29일 박건우(29) 씨가 충북 청주시 금천동 한 카페에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점자공보물을 읽고 있다. 심은진 PD
5월 29일 박건우(29) 씨가 충북 청주시 금천동 한 카페에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점자공보물을 읽고 있다. 심은진 PD

공직선거법에 따라 대선 후보는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점자형 선거공보물과 공약을 담은 USB(이동저장장치)를 제공해야 한다. 선거공보물을 점자로 바꾸면 분량이 늘어난다. 사진이나 도표 같은 시각 정보도 모두 점자로 풀어야 한다. 점자는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풀어 쓰는 방식이다. 글자 하나에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문자를 점자로 바꾸면 분량은 2.5배에서 3배까지 늘어난다. 

이번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제공된 공보물이다. 6명의 후보 모두 점자 공보물과 USB를 제공했다. 심은진 PD
이번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제공된 공보물이다. 6명의 후보 모두 점자 공보물과 USB를 제공했다. 심은진 PD

그런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점자형 선거공보물 분량을 책자형의 두 배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공보물의 최대 분량은 16면이므로 점자형은 최대 32면까지 제작할 수 있다. 점자 제작에 드는 시간과 비용, 전문 인력과 시설의 부족 등을 고려한 결과이지만, 이 때문에 비장애인용 공보물의 내용 일부가 빠지기도 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김준영 점역교정사는 지난달 10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이번 대선에서는 다행히 공약 누락이 없었지만, 지난 총선에서는 분량 제한 탓에 일부 공약이 빠진 사례가 있었다”고 말했다. 

문단 구분 없어 이해하기 어려운 음성 공보물

제한된 분량 안에 많은 내용을 담은 점자형 공보물은 여백 없이 촘촘히 인쇄된다. 점자를 만져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모든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읽는 것도 아니다. 2023년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시각장애인 5만 5천여 명 가운데 점자를 읽을 수 있는 비율은 13.7%에 불과하다. 나머지 85% 정도의 시각장애인에게 점자형 공보물은 무용지물이다. 

이를 고려해 각 정당 후보는 점자형 공보물과 함께 해당 내용이 담긴 USB를 제공하고 있다. USB 안에는 한글(HWP)이나 텍스트(TXT) 형식의 파일이 있다. 시각장애인은 이 파일을 열고, 컴퓨터에 설치된 화면 낭독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 내용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USB 음성 공보물은 텍스트 형태의 파일을 낭독 프로그램을 이용해 청취하는 방식이다. 해당 화면은 이재명 후보의 USB 공보물 파일이다. 전설 기자
시각장애인을 위한 USB 음성 공보물은 텍스트 형태의 파일을 낭독 프로그램을 이용해 청취하는 방식이다. 해당 화면은 이재명 후보의 USB 공보물 파일이다. 전설 기자

이번 대선에 나선 후보 5명 모두 이 같은 USB 음성공보물을 제공했지만, 시각장애인 입장에선 부족함이 있었다. 김문수, 이준석, 권영국, 송진호 후보는 텍스트 파일만 USB에 담았다. 특히 김문수 후보와 송진호 후보는 문단 구분이나 들여쓰기 없이 줄글 형태로만 공약을 소개했다. 이렇게 되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이 모든 내용을 하나의 긴 문장으로 인식해 읽게 된다. 시각장애인이 공약의 주제나 항목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달리 이재명 당시 후보는 음성 공보물에서 사진 설명과 표 내용을 구분하여 담았다. 또한 이 후보는 USB에 점자 전용 파일(BRF)도 따로 넣었다. 

왼쪽은 이재명 후보의 책자형 선거공보물 11페이지, 오른쪽은 같은 페이지의 내용을 담은 USB 텍스트 파일이다. 이 후보는 USB 파일에 분문과 구분되는 사진 설명을 따로 배치하여, 시각장애인의 이해를 도왔다. 출처 이재명 후보 책자형 선거공보물, USB 공보물
왼쪽은 이재명 후보의 책자형 선거공보물 11페이지, 오른쪽은 같은 페이지의 내용을 담은 USB 텍스트 파일이다. 이 후보는 USB 파일에 분문과 구분되는 사진 설명을 따로 배치하여, 시각장애인의 이해를 도왔다. 출처 이재명 후보 책자형 선거공보물, USB 공보물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제공된 USB(이동저장장치) 파일 형식과 내용을 후보자별로 비교했다. 그래픽 전설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제공된 USB(이동저장장치) 파일 형식과 내용을 후보자별로 비교했다. 그래픽 전설

시각장애인의 눈높이로 접근하면, 더 편리하고 쉬운 공보물 제작이 가능하다. 김준영 점역교정사는 “지금처럼 텍스트 파일만 넣는 방식은 접근성에 한계가 있다. 음성 파일(MP3) 형식으로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음성 파일로 공보물을 제공하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설치하지 않아도 누구나 어디서나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이러한 배려를 돕지 않는다. 시각장애인 등을 위해 ‘저장매체를 제공한다’는 규정만 있을 뿐, 그 형식과 내용을 정하지 않았다. 후보들은 가장 친절한 방법 대신 가장 간편한 방법을 택하게 된다. 

공약 읽어주는 ‘보이스아이’

그런 점에서 보면, ‘보이스아이’(문자음성변환 바코드)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보이스아이는 텍스트 내용을 바로 음성으로 들려주는 기술이다. 일반 공보물의 표지에 인쇄된 바코드를 스마트폰 앱이나 전용 리더기로 스캔하면 공보물 내용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선 권영국 후보와 송진호 후보가 보이스아이를 제공했다.

보이스아이는 일반 책자형 선거공보물에 붙어있다. 이번 대선에서 권영국 후보와 송진호 후보가 보이스아이를 제공했다. 심은진 PD
보이스아이는 일반 책자형 선거공보물에 붙어있다. 이번 대선에서 권영국 후보와 송진호 후보가 보이스아이를 제공했다. 심은진 PD

그런데 보이스아이 코드가 들어간 공보물은 비장애인에게만 제공된다. 장애인보다는 노약자 등을 위해 개발된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의 도움을 얻어 보이스아이를 제공받는다 해도 시각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이 남는다. 코드의 위치나 사용 방식에 대한 표준이 없어, 이를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김준영 점역교정사는 “눈을 감고 (공보물에 인쇄된) 바코드를 찍어서 그 내용을 들으라고 비장애인에게 안내한다면, 그걸 해낼 수 있는 비장애인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주변의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겐 현재의 보이스아이조차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공약도 모르고 투표하는 깜깜이 선거

그나마 대선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지방의원 선거,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 등에선 후보자가  점자 공보물과 USB 음성공보물을 제작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 만들어 일반 공보물과 함께 시각장애인에게 제공할 법적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시각장애 유권자를 위한 공보물 제출을 의무로 규정한 선거와 그렇지 않은 선거로 나뉜다. 그래픽 전설
현행법에 따르면, 시각장애 유권자를 위한 공보물 제출을 의무로 규정한 선거와 그렇지 않은 선거로 나뉜다. 그래픽 전설

전지혜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난달 20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지방선거에선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지역 밀착형 공약이 많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를 알려주는 시각장애인용) 공보물 없이 투표소에 가라는 건 뭐가 뭔지 모르고 투표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시각장애인 유권자의 정보 접근권을 위해 모든 선거에서 점자 공보물과 USB 제공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시각장애 유권자를 위한 공보물 제출 현황이다. 그래픽 전설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시각장애 유권자를 위한 공보물 제출 현황이다. 그래픽 전설

허술한 법률 탓에 시각장애 유권자는 선거 정보를 얻기 쉽지 않다. 점자형 공보물은 면수 제한 탓에 공약 전체를 담기 어렵고, USB 음성 공보물은 글자로만 채워져 표·그래프·사진으로 제공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우며, 보이스아이 서비스는 비장애인에게만 제공된다. 이런 어려움을 시각장애인만 겪는 게 아니다. 다음 편에서는 청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의 이야기를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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