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투표를 막는 장벽] ② 장애인이 이해할 수 없는 토론과 공보물

<기사 순서>

① 친절한 방법 대신 간편한 방법 택한 대선 후보들

② 제발 선거 정보를 통역해주세요

③ 투표소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

④ 참정권의 그늘에 볕이 들려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 정보를 얻기 어려운 시각장애인의 현실을 지난 1편에서 짚었다. 청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의 상황은 어떨까?

다섯 명의 말을 통역하는 한 사람

충청북도 제천시에 사는 이재호(55) 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사고로 청력을 잃었다. 이 씨의 주된 소통 방식은 수어다. 제천시에서 수어통역센터를 운영하는 그는 한국농아인협회 제천시지회장이기도 하다. <단비뉴스>는 지난 5월 29일 제천시 수어통역센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수어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날은 ‘대선 후보자 TV 토론회’가 끝난 이틀 후였다. 

이재호(55) 씨가 지난 5월 31일 충북 제천시 명동 수어통역센터에서 수어로 대화하고 있다. 심은진 PD
이재호(55) 씨가 지난 5월 31일 충북 제천시 명동 수어통역센터에서 수어로 대화하고 있다. 심은진 PD

공직선거법은 대통령 선거 입후보자의 TV 토론을 세 차례 이상 개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상파 3사(KBS·MBC·SBS)도 이번 대선 TV 토론회를 세 차례 생중계했다. 촉박한 일정 속 대선이 치러진 만큼, 후보자의 공약과 정치적 비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런 TV 토론회가 이 씨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이 생중계한 토론 장면을 보면, 후보자 4명과 사회자 1명 등 모두 5명의 발언을 단 한 명의 수어 통역사가 전달했다. 통역사가 수어로 번역하는 말이 어느 후보의 말인지 헷갈리고 혼란스러웠다고 이 씨는 단비뉴스 기자에게 말했다. 후보 간 공방이 오가면 그런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지난 5월 23일 열린 제21대 대통령 선거 2차 TV 토론회 장면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한 명의 수어 통역사가 사회자 1명, 후보자 4명의 발언을 혼자 통역하고 있다. MBCNEWS 유튜브 화면 갈무리
지난 5월 23일 열린 제21대 대통령 선거 2차 TV 토론회 장면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한 명의 수어 통역사가 사회자 1명, 후보자 4명의 발언을 혼자 통역하고 있다. MBCNEWS 유튜브 화면 갈무리

작은 화면 속 작은 손동작

“비율로 따지면 거의 9.5대 0.5예요. 화면이 너무 작아서 못 봐요.” 이 씨의 말처럼 TV 화면 속 수어 통역 화면은 매우 작다. 복잡한 용어가 나오면 통역사의 수어도 정교해지는데, 작은 화면으로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립지원정책’ 같은 전문 용어나 신조어는 아직 수어 단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런 단어는 수어 통역사가 ㅈ, ㅏ, ㄹ, ㅣ, ㅂ 과 같이 한 글자씩 손으로 표현한다. 화면이 작으면 그런 미세한 손동작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다. “(비장애인들은) 방송 소리를 줄이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답답하지요? 우리한테는 작은 화면이 딱 그래요.”

거리 유세 현장도 마찬가지다. 유세 내용을 수어로 통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리를 동원한 선거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오직 시각 정보만 활용해야 한다. 특히 인터넷 접근이 어려운 고령 청각장애인은 집으로 배달되는 공보물 말고는 선거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하다고 이 씨는 설명했다. 

TV 토론 수어 통역사, 후보자별로 배치돼야

공직선거법 82조 2항은 ‘청각장애 선거인을 위해 자막방송 또는 한국수어통역을 하여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어 통역사의 수와 화면 크기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진 않았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선거방송을 송출할 때 수어 통역사 2인 이상을 배치하라고 지상파 3사에 권고했지만, 실질적 변화는 없었다. 이번 대선에서 각 방송사는 2명의 통역사를 방송 토론에 배치했지만, 한 명이 전반부, 다른 한 명이 후반부의 통역을 맡았다. 복수의 통역사가 후보별 발언을 구분하여 제공하라는 인권위 권고의 원래 취지와 거리가 멀었다. 

후보자별 발언을 구분하여 통역하는 방송이 있긴 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22년 제20대 대선부터 <복지TV>와 협력해 실시간 수어 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복지TV는 사회자와 후보자별로 한 명씩 수어 통역사를 배치해 토론 내용을 수어로 전달한다. 자막도 함께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다. 

다만, 모든 유권자가 접근할 수 있는 지상파 방송과 달리 케이블채널인 복지TV를 보려면 별도로 돈을 내고 가입해야 한다. 조한진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난달 5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복지TV로 수어 통역을 보라는 건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분리하는 방식이므로 명백한 차별”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청각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방송 토론을 볼 수 있도록 지상파에 복수의 수어 통역사를 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지TV에서는 사회자와 후보자 별로 일대일 수어 통역과 자막이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해당 화면은 지난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토론회의 한 장면이다. 복지TV 유튜브 화면 갈무리
복지TV에서는 사회자와 후보자 별로 일대일 수어 통역과 자막이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해당 화면은 지난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토론회의 한 장면이다. 복지TV 유튜브 화면 갈무리

공약집을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

친절한 통역이 필요하기로는 발달장애인도 마찬가지다. 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피플퍼스트성북센터’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박연지(33) 씨는 경계선 지적장애인이자 뇌병변장애인이다. 박 씨는 지난 대선 공보물을 집에서 받았지만, 끝까지 읽지 못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그냥 버렸다”라고 박 씨는 단비뉴스 기자에게 말했다.

박연지(33) 씨가 지난 5월 29일 서울 성북구청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진주PD
박연지(33) 씨가 지난 5월 29일 서울 성북구청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진주PD

발달장애인은 정보를 더디게 처리한다. 언어 이해력도 제한적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이나 추상적인 표현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전문 용어가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려면, 보호자나 활동지원사가 쉽게 풀어 설명해줘야 한다. 그런 도움 없이 스스로 판단하려면, 쉬운 정보가 필요하다. 

박 씨를 비롯한 발달장애인들은 ‘쉬운 공약집’ 제작을 요구해 왔다. 쉬운 공약집은 후보들의 공약을 쉽게 풀어 쓴 공약집이다. 한자어나 영어 대신 쉬운 단어만 쓴다. 복잡한 정책은 이미지로 바꿔 핵심만 전달한다. 예를 들어 ‘예산’은 ‘돈’으로, ‘복지정책 확대’는 ‘도움을 더 많이 주겠다’라고 표현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유엔장애인권리협약도 ‘장애 특성에 맞춘 정보 제공’을 국가의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처음으로 ‘쉬운 공약집’ 제작한 후보들

그동안 쉬운 공약집은 주로 민간단체가 만들었다. 특히 2017년 창립한 사회적기업 ‘소소한 소통’은 지난 2022년 대선 때부터 쉬운 공약집을 만들었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주요 후보들의 공약을 쉽게 풀어 쓴 공약집을 만들어 지난 5월 26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민간의 노력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이번 대선에선 정당 차원의 쉬운 공약집이 처음 등장했다. 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김문수, 권영국 후보는 스스로 쉬운 공약집을 만들어 후보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세 후보 모두 선관위의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제작 가이드를 바탕으로 소소한 소통의 자문을 받았다. 반면 이준석, 황교안, 송진호 후보는 쉬운 공약집을 제작하지 않았다.

이재명, 김문수, 권영국 후보의 쉬운 공약집을 공약 원문과 비교했다. 그래픽 전설
이재명, 김문수, 권영국 후보의 쉬운 공약집을 공약 원문과 비교했다. 그래픽 전설

쉽게 설명했다지만, 늦게 오고 일부만 담은 공약집

발달장애인 등에게 긴요한 쉬운 공약집은 공직선거법상 의무 사항은 아니다. 이와 관련한 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가이드를 마련해 두고 있지만, 실제 제작과 배포는 각 정당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 쉬운 공약집을 장애인에게 전달하는 일은 오직 후보자의 자발성에 기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이번 대선에서 공개된 쉬운 공약집의 수준과 내용을 보면, 후보별 편차가 컸다. 

이재명 후보는 사전투표 하루 전인 5월 28일,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에 쉬운 공약집을 공개했다. 일반 책자형 선거공보물이 5월 18~22일에 각 가정으로 배달된 것을 감안하면, 열흘 정도 늦은 시점이었다. 

내용 역시 제한적이었다. 쉬운 공약집에는 장애인 관련 정책만 담겼고, 노동·경제·안보 등 다른 분야의 공약을 소개하진 않았다.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 박연지 씨는 “(쉬운 공약집이라고 해서) 장애인 공약만 나오는 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나도 경제나 사회 전반의 공약을 알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 28일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에 공개된 이재명 후보의 쉬운 공약집 일부다. 사전투표 하루 전 공개된 쉬운 공약집에는 장애 정책만 담겼다. 출처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지난 5월 28일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에 공개된 이재명 후보의 쉬운 공약집 일부다. 사전투표 하루 전 공개된 쉬운 공약집에는 장애 정책만 담겼다. 출처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권영국 후보는 사전투표 이틀 전인 5월 27일 쉬운 공약집을 공개했다. 시점은 이재명 후보보다 하루 앞섰지만, 내용 구성은 비슷했다. 장애 정책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다른 분야의 정책은 확인할 수 없었다. 

지난 5월 27일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공개된 권영국 후보의 쉬운 공약집 일부다. 사전투표 이틀 전 공개된 쉬운 공약집에는 장애 정책만 담겼다. 출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지난 5월 27일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공개된 권영국 후보의 쉬운 공약집 일부다. 사전투표 이틀 전 공개된 쉬운 공약집에는 장애 정책만 담겼다. 출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이와 관련해 전지혜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난달 20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장애인 유권자는 장애 정책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드러난 것”이라며 “장애인도 경제·사회 등 전체 정책을 알고 투표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또 “장애인 정책만 소개하면서 ‘(장애인에게) 정보 접근성을 보장했다’고 말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정보의 동시성과 내용의 대등성은 (장애인을 동등하게 대하기 위한) 당연한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후보나 권영국 후보와 달리 김문수 후보의 쉬운 공약집은 노동, 복지, 환경 등 10대 주요 정책을 대부분 담았다. 다만, 사전 투표 하루 전인 5월 28일에 공개된 내용을 보면, 사회적기업인 소소한 소통이 제작하여 이미 공개한 ‘쉬운 10대 공약’과 유사했다. 주명희 소소한 소통 총괄본부장은 지난달 9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김문수 캠프 측은 전체 공약을 쉬운 공약으로 만들기를 원했지만, 제작 시간이 부족해 (소소한 소통이) 이미 만들어둔 자료를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라고 말했다. 이미 공개된 자료를 그대로 활용한 만큼, 실효성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5월 28일 국민의힘 홈페이지에 공개된 김문수 후보의 쉬운 공약집 일부(왼쪽)와 소소한 소통의 ‘쉬운 10대 공약’ 일부(오른쪽)를 보면, 서로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출처 국민의힘 홈페이지, 소소한소통 홈페이지
지난 5월 28일 국민의힘 홈페이지에 공개된 김문수 후보의 쉬운 공약집 일부(왼쪽)와 소소한 소통의 ‘쉬운 10대 공약’ 일부(오른쪽)를 보면, 서로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출처 국민의힘 홈페이지, 소소한소통 홈페이지

후보 재량에 맡겨진 선거 정보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쉬운 공약집 제작 현황이다. 그래픽 전설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쉬운 공약집 제작 현황이다. 그래픽 전설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면, 점자 공약집처럼 쉬운 공약집을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지혜 인천대 교수는 “쉬운 공약집은 발달장애인뿐 아니라, 인지장애가 있는 고령층과 복잡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기 어려운 일반 유권자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며 “쉬운 공약집 공개를 (대선 후보의) 법적 의무로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5월 30일 서울특별시 혜화동 거리에 제21대 대통령 선거 벽보가 걸려있다. 전설 기자
지난 5월 30일 서울특별시 혜화동 거리에 제21대 대통령 선거 벽보가 걸려있다. 전설 기자

그런 법적 제도가 만들어져도 넘어야 할 장벽은 남아 있다. 진짜 어려움은 선거 당일에 시작된다. 장애 유권자가 투표 현장에서 마주한 또 다른 문제를 다음 편에서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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