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투표를 가로막는 장벽] ③ 투표소마다 다른 장애인 참정권 보장
<기사 순서>
지난 1편과 2편에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 정보를 얻기 어려운 장애인의 현실을 짚었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은 투표 당일 시작된다. <단비뉴스>는 사전투표일이었던 지난 5월 29일, 발달장애인 박연지(33) 씨와 함께 투표소를 찾았다.
기자회견으로 시작한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29일 투표율은 19.58%로 역대 최고치였다. 박연지 씨도 투표를 위해 집을 나섰다. 그가 먼저 찾은 곳은 투표소가 아닌 서울 광화문 광장이었다.
지적장애인이자 뇌병변장애인인 그는 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피플퍼스트센터’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이날 오전 10시, 박 씨는 동료 20여 명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쉬운 공약집 제작’과 ‘쉬운 투표용지 제작’, ‘투표보조 보장’ 등 참정권 보장을 요구했다. 기자회견은 50분 동안 이어졌다.
기자회견을 마친 박 씨는 제21대 대통령선거 투표를 위해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사전투표소를 찾았다. 다른 발달장애인 6명과 비장애인 활동가도 함께 갔다. 투표소 앞엔 긴 줄이 이어졌지만, 현장 직원과 시민들의 배려 덕에 이들은 줄의 맨 앞에 설 수 있었다.
손 떨림 테스트
발달장애인은 운동 기능 조절과 정보 처리에 어려움을 겪는다. 투표용지에 적힌 언어를 이해하거나 지지 후보의 칸에 정확히 기표하는 게 쉽지 않다. 박 씨도 한쪽 몸이 경직돼 있어 오른팔을 자유롭게 쓰기 어렵다.
사직동 사전투표소에 입장한 박연지 씨는 “손이 떨려 혼자 기표하기 어렵다”며 투표관리관에게 투표보조를 요청했다. 투표 관리관은 대답 대신 네모 칸이 가득한 하얀 종이를 박 씨에게 내밀었다. 기표 도구의 잉크 상태를 확인하는 데 쓰이는 ‘기표 용구 시험용지’였다. 투표관리관은 그 종이에 “도장을 찍어보라”고 말했다.
손 떨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였다. 박 씨가 용지의 상단에 찍은 도장 자국은 온전한 원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투표 관리관은 “기표행위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손 떨림이 심한 경우가 아니면 투표보조는 불가능하다”며 투표보조를 허용하지 않았다. 투표 관리관은 박 씨의 장애 유형이나 투표 때 겪는 어려움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관련 규정만 반복하여 읽었다.
울면서 뛰쳐나온 투표소
박연지 씨는 투표보조 불허에 항의하며 사직동 투표소를 떠났다. 박 씨가 거절당하는 장면을 본 다른 4명의 발달장애인은 불쾌하다며 투표를 거부하고, 투표소를 떠났다. 테스트에 응한 다른 발달장애인에게 사직동 투표관리관은 “눈에 띄게 손을 떤다”며 투표보조를 허용했다.
사직동 투표소에서 투표보조를 거부당한 박 씨는 직장 인근인 성북구 삼선동 사전투표소를 다시 찾았다. 박 씨는 투표관리관에게 자신이 발달장애인임을 밝히고, 투표보조를 요청했다.
삼선동 투표관리관의 판단은 사직동 투표관리관과 달랐다. 사전테스트 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표에 어려움이 있다면 보조가 가능하다”고 안내했다. 박 씨는 활동 보조사, 투표관리관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 투표를 마쳤다. 투표를 마친 박 씨는 “어디서는 안 되고, 어디서는 되고, 이게 차별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투표소마다 제각각인 투표보조 허용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은 ‘시각장애나 신체장애로 인해 직접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가족 또는 본인이 지정한 2인의 도움을 받아 투표할 수 있다’고 정했다. 다만, 이 조항은 ‘발달장애’를 따로 규정하진 않았다. 장애인 투표권 보장을 위해 ‘투표보조’ 제도를 만들었지만, 그 장애인의 범주에 발달장애인이 포함되는지를 모호하게 내버려둔 것이다.
2016년 중앙선관위는 이 법률을 유권 해석하여 ‘혼자 기표할 수 없는 상태의 발달장애인에게도 투표보조를 허용’하도록 투표 관리 매뉴얼에 명시했다. 이 내용은 2022년 돌연 삭제됐다. 유권 해석의 내용이 현행 법령과 배치될 여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법적 혼란 또는 공백 상황에서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 허용 여부는 투표소마다 제각각 다르게 판단되고 있다.
투표보조 인정한 법원, 재판 당사자만 허용한다는 선관위
박 씨가 사직동 투표소에서 투표보조를 거부당한 다음 날인 5월 3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재판장 김상훈)는 “발달장애인은 투표소에서 보조를 받지 않으면 선거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보조 편의 제공은 비장애인과 동등한 수준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판단하고, ‘발달장애인에게 투표보조를 허용하라’는 임시조치를 내렸다.
임시조치는 본안 판결이 나오기 전 긴급하게 내리는 잠정 결정이다. 과거 선거에서 투표보조를 거부당한 A 씨 등 2명이 2023년 제기한 소송이 진행 중이었는데, 담당 재판부가 최종 판결 이전인 이번 대선을 위해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를 긴급히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중앙선관위는 법원의 임시조치 직후 입장을 내놓고, 이번 결정이 “해당 청구인 2명에게만 적용된다”고 밝혔다. 민사 소송에 관한 판결의 효력은 원칙적으로 청구인에게만 한정된다는 이유였다.
김재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변호사는 지난달 9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재판 효력은 원칙적으로 그 당사자에게만 미치는 것이 맞다”면서도 “그러나 선거는 모든 유권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치르는 것이고, 법원의 이번 판단 역시 (선거권의 보편성이라는) 그러한 전제를 반영한 것이라면, 그 취지에 따라 (청구인이 아닌) 다른 발달장애인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의 임시조치를 제한적으로 해석한 선관위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발달장애인들은 참정권 보장을 위해 그림 투표용지 제공, 모의투표 전국 확대, 이해하기 쉬운 공약집 제작, 투표보조인 동반 허용 등 4가지 핵심 사항을 계속 요구해 왔다. 이 가운데 정부가 받아들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림 투표용지 도입은 일반 투표용지에 없는, 후보자의 사진과 정당 로고, 색상 등을 넣어 장애인에게 제공하자는 방안이다. 이미 영국, 대만, 이집트 등 여러 나라에서 활용되고 있다. 비장애인 가운데 글자나 숫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도 이를 선택하여 투표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선 공직선거법을 개정하고, 전자개표기를 교체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이를 감안한 현실적 대안으로 ‘그림 투표보조 용구’가 있다. 기존 투표용지를 그대로 사용하되, 장애인들의 이해를 돕는 보조 용구를 끼우는 방식이다. 지난해 12월, 관련 소송에서 법원은 이러한 보조용구 제공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선관위는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상고했다.
모의투표는 실제 선거와 비슷한 절차와 환경을 체험해 보는 활동이다. 낯선 공간과 규칙에 대한 장애인들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 선관위나 지자체, 복지관, 교육청 등이 일부 지역에서 비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지만, 현행법상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전국의 모든 장애인에게 보편적으로 보장되는 제도로 보기 어렵다.
전지혜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난달 20일 단비뉴스와 통화에서 “사전에 투표 과정을 체험하거나 연습하는 기회가 있다면 (장애인들이) 투표에 훨씬 수월하게 참여할 수 있다. 특히 발달장애인에겐 낯선 환경의 돌발 상황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어, 익숙한 환경을 조성하는 준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해하기 쉬운 공약집은 지난 2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후보들의 공약을 쉽게 풀어 쓴 공약집이다. 예를 들어 ‘자유 주도 성장’을 ‘자유롭게 성장하는 나라, 기업이 잘되는 나라를 만들게요’라고 설명하여, 장애인의 이해를 돕는다. 다만, 공직선거법상 의무사항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투표보조는 앞서 확인한 것처럼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장애인에게 두루 적용되지 않고 있다.
박연지 씨는 “선거는 축제라지만, 우리에겐 고난”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참정권과 투표권을 장애인의 눈높이에서 보장하면, 노인도 편해진다”라고도 말했다. 쉬운 말로 공약을 설명하고, 투표용지에 정당 로고와 색을 넣고, 동작하기 어려운 이들을 돕는 투표보조가 널리 보장되면, 일반 유권자와 고령층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발달장애인 뿐만이 아니다. 다음 편에서는 시각장애와 지체장애 유권자가 투표 현장에서 마주한 문제를 보도한다.
단비뉴스 청년부, 시사현안팀장 전설입니다.
기자를 직업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 삼겠습니다. 치열하게 배우고, 단단히 실천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