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령 칼럼] 새 정부에 바라는 언론 정책
2017년 이후 한국 언론과 정보생태계를 지배한 용어는 ‘가짜뉴스’라는 단어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언론중재법 개정을 통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보도에 손해액의 5배까지 배상하게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려 했다. 이 법안은 ‘언론탄압’이라는 언론계의 반발과 ‘가짜뉴스 방지’라는 정부 여당의 프레임만 맹렬히 충돌하다가 무산됐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서 사용하던 ‘허위조작정보’라는 용어 대신 ‘가짜뉴스’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썼다. 윤 정부의 적극적인 가짜뉴스 대응 기조는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허위정보에 대한 규제나 억지가 아닌 정부 여당 등에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기사를 낸 언론사 기자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형사고발로 구체화 됐다.
그러나 이처럼 가짜뉴스를 척결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은 극우 유튜브가 반복적으로 주장해온 음모론인 ‘부정 선거론’을 맹신했다. 가짜뉴스 척결을 주장한 당사자가 가짜뉴스에 심취해 있었던 역설은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권력에 의한 언론탄압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자신의 정치 진영에서 생산되는 허위조작정보에는 눈을 감고, 반대 진영에서 생산되는 것에만 ‘가짜뉴스’라고 낙인찍는 방식의 정치화된 가짜뉴스 방지 정책은 언론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부추겼다. 서부지법 폭동 당시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소속 매체를 불문하고 폭도들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양극화와 함께 그 세력을 키워온 언론혐오가 민주주의 부정이라는 새로운 차원에 진입했음을 경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복원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새 정부는 허위조작정보에 대해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대증적인 대처를 해 온 그간의 정책기조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 허위조작정보를 정말로 뿌리 뽑으려 한다면 정보생태계의 체질을 바꾸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론장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언론의 ‘생존’ 보장하는 지원 필요해
첫째, 한국 사회 공론장의 토양을 튼튼히 한다는 차원에서 언론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2018년 허위조작정보를 억지할 종합대책을 내놓았던 유럽연합(EU)은 양질의 저널리즘 육성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허위조작정보에 대한 궁극적인 방어 수단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의 유통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지금 한국 언론은 생성형 AI시대를 맞아 새로 태어나는 수준의 갱신을 요구받고 있다. 생성형 AI로 필요한 답을 얻는 시민들이 정작 생성형 AI의 정보 원천인 뉴스로 연결되는 링크는 열어보지 않는 ‘제로 클릭’ 시대가 예견되고 있다. 이미 한국에서는 포털이 만든 정보생태계에서 뉴스는 무료로 보는 것이라는 소비 습관이 고착해 있다. 이렇게 된 데는 포털을 비난하면서도 포털이 제공하는 수익 구조에 안주해 온 한국 언론의 책임이 크다.
이재명 정부의 언론 정책 기조는 생성형 AI시대에도 어떻게 하면 양질의 언론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 정부에 호의적인가, 비판적인가라는 선별 기준을 넘어서서 양질의 뉴스를 만들기 위해 혁신을 시도하는 언론사라면 지원해야 한다. “레거시 미디어는 너무 편향돼 있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잘 정리된 정보를 보라”라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발언은 왜 사실에 기반한 공론장이 유지되는데 레거시 미디어가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했다. 보수·진보로 정치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는 언론이라면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한 축으로서 포용하고 인정해야 한다. 급변하는 정보 생태계 속에서 새로운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언론에 숨 쉴 구멍을 제공하는 것이 민주 정부가 택해야 할 언론 정책이다. 특히 지역 소멸에 맞닥뜨려 뉴스룸 내부의 인력도, 자금도, 언론을 지지해 줄 시민도 잃어가고 있는 지역 언론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연속성 있는 허위조작정보 대처 계획 마련
둘째, 허위조작정보 대처는 공공 건강이나 보건과 마찬가지로 공익의 영역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번 정부뿐만이 아니라 차기 정부까지 연속될 수 있는 장기적인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생성형 AI시대에 대응하는 자동화된 팩트체킹(Automated Fact Checking) 같은 것은 오랜 데이터 집적과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한국어로 제대로 된 사실검증이 이루어지려면 한국어로 된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고, 상업성이 없어도 공익을 위해 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연구진이 지속가능성을 염려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생성형 AI에 대처하는 자동화된 팩트체킹이 학습모델로 삼는 데이터베이스는 인간 팩트체커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한국에서는 인간 팩트체커들의 활동 기반이 열악하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언론사조차 수익이 창출되지 않는 팩트체크 저널리즘에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려 하지 않는다. 팩트체크 저널리즘을 지원했던 플랫폼 기업은 정치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
팩트체크 저널리즘의 불편부당성을 지키기 위해서 재정 지원은 내용적 간섭을 하지 않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 아래 이뤄져야 한다. 국제사회의 사례처럼 허위조작정보가 유통되는 플랫폼 기업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한 방편으로 팩트체크 저널리즘을 후원해야 하며 정치권은 이에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 검증의 주체가 불편부당성을 지키고 공익에 봉사하는 한, 정부는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강화
셋째, 신뢰할 수 있는 정보생태계는 결국 시민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시민들이 스스로 접하는 정보의 사실성과 질을 판단할 수 있도록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강화하겠다며 입시 과목에 미디어 리터러시를 포함하자는 논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미디어 리터러시의 의미를 고도로 발전한 정보생태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민들이 갖춰야 할 자질보다는 점수를 획득해야 하는 과목으로 지극히 협소화해 버릴 위험이 있다. 유치원생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전 세대의 시민들이 각각의 처지와 능력에 맞게 언제, 어디에서든 접할 수 있는 보편 교육으로서 적극적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단숨에 허위조작정보를 뿌리 뽑고 싶어하는 입법자들과 행정가들에게는 한가하고 미지근한 대책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보를 접하는 시민의 태도와 자질을 뿌리부터 바꾼다는 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진정한 의미의 급진이라 할 수 있다.
비판자의 쓴소리에도 귀 기울이길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언론혐오의 적대적 분위기를 완화하는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극렬 지지자들은 언론에 대한 조리돌림을 단결의 지표처럼 사용해 왔다. 이는 건전한 미디어 비판도, 민주 시민의 소양도 아니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도자가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 대통령실은 브리핑룸에서 질문하는 기자들의 모습을 생중계할 방침이다. 질문자도 답변자도 서로 책임 있고 투명하게 묻고 답하자는 이 조치는 환영할 일이다. 극렬 지지자들에 의해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기자가 ‘좌표 찍힐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지난 정부들에서 실제 그런 사례들이 있었으니 기우만은 아니다.
만약 합리적인 사유가 있음에도 비판적인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공격 받는 기자가 있다면, 이재명 대통령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엄호해 주길 바란다. 언론을 존중하는 대통령의 모습만큼 더 설득력 있는 언론 정책은 없을 것이다. 내게 쓴 소리를 하는 언론도 나를 강하게 하는 비판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 정부는 더욱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언론의 미래를 숙고하고, 정보생태계의 체질을 바꿀 정책을 내놓는 성숙한 정부를 기대한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간하는 <신문과 방송> 2025년 7월호 커버스토리 ‘새 정부에 바란다’에 실렸던 것을 기관의 양해를 구해 전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