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고하늘 PD

“죽음으로 삶을 지탱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 최명길은 청나라 군대와 끝까지 싸우자는 예조판서 김상헌에게 비장한 어조로 말한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백성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없으니 목숨을 걸고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 치의 양보 없는 설전을 지켜보던 임금은 “그만하라”고 분을 터뜨릴 뿐,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조선 인조 14년, 청나라 군대에 쫓겨 남한산성까지 피신했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내몰린 백성들을 보면서도 명분과 실리의 공방을 쉽게 끝내지 못했다.

▲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과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다. ⓒ 영화 <남한산성>

남한산성에 갇힌 대한민국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대의명분 때문에 청과의 화친을 거부했던 척화파(斥和派)와 우유부단했던 인조를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 어떤 명분보다 만백성의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도 어쩌면 남한산성에 갇혔던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핵이라는 약점 때문에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 사이에서 곤란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우리의 상황이 영화의 잔상과 겹쳤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척화파만큼이나 고집스런 ‘친미사대주의’도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G2’로 불리는 두 강대국의 역학관계가 변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살 길은 무엇보다 실리 중심의 지혜로운 외교를 하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명나라처럼 조만간 쇠락할 운명이라고 볼 순 없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1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이며 최강의 군사대국이다. 미국 달러는 아직까지 명실상부한 기축통화이며 법과 제도, 문화, 첨단기술과 같은 소프트 파워도 막강하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 후의 이라크침공 등 명분 없는 군사개입과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로 드러난 경제지배논리의 허점 등으로 미국의 위상은 도전받고 있다. 더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미국 우선주의’가 노골화하면서 미국 외교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 실현에 점점 더 집중하는 모습이다.

한동안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힘을 기르자는 ‘도광양회’를 표방했던 중국은 이제 본격적인 ‘굴기(堀起: 몸을 일으킴)’를 보여주고 있다. 14억 인구가 매년 10% 가까운 경제성장을 지속한 결과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됐고, 군사비 지출에서도 미국 바로 뒤를 추격하고 있다. 미국이 탈퇴한 유네스코와 파리기후변화협정 등에서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조짐이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중국이 미국을 대체한 유일한 패권국가가 될 가능성은 낮지만,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은 갈수록 더욱 확고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우리는 이제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최대교역국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처럼 중국의 입장을 외면하고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성급하게 배치해 갈등을 빚는 일은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미·중 갈등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고 우리가 지렛대를 쥘 수 있도록 ‘투 트랙 전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의 핵도발에 맞서 국제 제재에 동참하되, 물밑으론 대북특사 등으로 북한과 대화채널을 뚫고 중재방안을 찾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통해 개성공단 등 경제협력을 재개하면 미·북 직접대화나 6자회담 등의 멍석도 깔아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평창겨울올림픽에서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하고 북의 고위층과 악단, 응원단이 방문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 있는 성과이자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 있다.

▲ 2018 평창겨울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이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 MBC

양강 시대 돌파구 찾는 조건은 우리 내부의 통합

우리나라가 운전대를 잡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이끄는 데 미국과 중국이 온전히 협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패권 경쟁관계에 있는 양국의 상황을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모두에게 이로운 ‘윈윈(win-win)’의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조건은 우리 내부의 통합이다. 남한산성의 척화파와 주화파처럼 둘로 갈라져 싸우는 데 골몰한다면 모든 것을 다 잃는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 ‘백성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건 없다’는 원칙 아래, 평화를 위한 토론과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편집 : 김미나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