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과천 경마공원 ‘꿈꾸는마차’ 채광실 대표

“이 밀가루요? 제가 개성에서 날라 왔고요. 이 씨앗이요? 저 나진·선봉에서 가져왔어요. (웃음) 한번 드셔보세요.”

정갈하게 묶은 머리에 빨간색과 흰색이 섞인 모자를 단정하게 눌러쓴 채광실(41·여) 씨가 손님에게 농담을 던지며 호떡을 건넨다. 14년 전 북한을 탈출한 그가 개성과 나진·선봉에서 호떡 재료를 가져올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 ‘탈북자 사장님’이 운영하는 푸드트럭 ‘꿈꾸는마차’ 앞에 모여든 손님들은 그의 밝고 친절한 웃음에 장단을 맞추며 호떡과 어묵 등을 사 간다. 금요일인 지난 5월 19일, 경마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오후 6시가 돼서야 채 씨는 숨을 돌리며 의자에 앉았다.

북한서 ‘돈장사’하다 재산 몰수당하고 탈북

▲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에서 푸드트럭 ‘꿈꾸는마차’를 운영하는 채광실씨가 호떡을 담으며 활짝 웃고 있다. © 김민주

“이만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 상상 못 할 일이에요. 한국에 온 지 8년 만에 얻은 기회잖아요. 이것을 잘 활용 못 하고 하루를 껄렁껄렁, 다음날을 땜빵? 그렇게 할 순 없어요.”

채 씨는 한국마사회의 렛츠런재단과 남북하나재단이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푸드트럭 창업지원사업’ 덕에 지난해 11월 경기도 과천시의 과천 경마장에서 푸드트럭을 시작했다. 트럭과 창업비용 등 약 1500만 원~2000만 원을 지원받고 과천 경마공원에서 2년간 무상으로 영업할 수 있게 됐다. 과천 경마공원에는 연간 400만 명 이상이 방문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다. 그는 지난해 9월 초 1차 선발에서 떨어졌다가 9월 말 2차 선발에 가까스로 붙었던 얘기를 들려주며 가슴 벅찬 표정을 지었다.

북한에서 그의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상점 경리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부업으로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했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과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채 씨도 어머니가 밑천을 대줘 전과 쌀, 산돼지를 파는 장사를 했다. 사유재산을 제한하는 북한 체제에서 이 모든 것은 불법이었지만 뇌물을 주면 경찰은 넘어갔다. 그러다 한순간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 고향에서 브로커에게 미국 달러를 구해 평양의 높은 환율로 환전해서 북한 돈을 불려 나가는 ‘돈장사’를 하다 경찰에 걸린 것이다. 가택수사를 받고, 하루아침에 거의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당시 채 씨는 26살이었고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돈을 벌어오기로 결심하고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2003년 두만강을 건넜다. 집에서 아이를 봐주던 사람이 소개해 준 브로커를 따라 중국에 도착하자, 자신을 데리러 나온 조선족이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했다. 자신을 중국 돈 7천 위안(약 120만 원)에 샀다는 얘기였다. 그는 “한없이 올라간 만큼 내려가 보자”는 생각으로 울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의도치 않게 중국에서 결혼해 딸 둘을 출산했다.

8년 전 남한에 온 후 아르바이트 전전

중국 생활 6년째였던 2009년, 남한에 가면 탈북자도 국적을 취득할 수 있고 자녀도 다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해 3월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딸 둘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이후 일정한 직업 없이 여행사, 중국 비자 대행 업무, 화장품 외판원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꿈꾸는마차는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다.

지원 대상자로 뽑힌 후 한 달 만에 메뉴와 조리법 개발, 트럭 설비까지 모두 마쳐야 하는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신이 났다. 채 씨는 어린 시절 ‘눈 뜨고 본 게 먹거리’일 정도여서 요리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홉 살부터 집에서 밥을 차렸고 열두 살부터는 직접 어머니를 도와 옥수수빵을 굽고 옥수수엿과 곡주, 두부를 만들었다. 외할머니는 탄광 식당에서 평생 주방장으로 일해, 누룽지를 먹으러 자주 놀러 가곤 했다.

하지만 북한과 다른 남한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뭐가 좋다 하면 바로 뛰어가서 남이 하는 것을 봤다”고 초창기를 회고했다. 한번은 낮 1시에 부산 어묵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를 몰고 갔다가 다음 날 새벽 5시에 올라왔다. 3개월 반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죽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버린 밀가루만도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처음 푸드트럭을 열었을 땐 손님 중 30%가 맛에 대해 불평했지만, 이제는 100명 중 1명도 안 될 정도고, 다들 맛있어한단다.

주말엔 서너 시간 쪽잠, 장사 끝나면 링거 맞아

평일에는 집에서 좀 더 맛있는 호떡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다. 그리고 경마가 있는 금요일부터 주말 3일은 ‘전투 모드’에 들어간다. 서너 시간 눈을 붙인 후 새벽 2시에 일어나 당일 장사 준비를 한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발효과정을 거치며 호떡의 속을 만들고, 채소를 썰고 당면을 삶고, 준비한 재료를 차에 모두 실으면 4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설 정도로 정신없이 차에 탄 뒤 서울 노원구 집에서 출발해 과천에 도착하면 아침 7시가 된다.

푸드트럭에 올라 오전 9시 영업 시작 전까지 찹쌀 도넛을 튀기고 어묵 육수를 만들고 호떡 반죽을 한다. 이렇게 오후 6시까지 물 한 모금 먹을 새 없이 일하는데, 손이 모자라 탈북자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 경기가 끝나고 손님이 빠져나가는 저녁 여섯시부터 뒷정리를 하고 집에 오면 밤 열 시. 이렇게 3일간 중노동을 끝내고 나면 다음 날 병원에서 링거를 맞아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정도다.

▲ 손님들이 줄을 서서 채 씨의 호떡과 어묵을 기다리고 있다. © 김민주

울상으로 왔던 손님도 웃으며 돌아가게

이런 노력과 정성은 꾸준한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과천 경마공원에 있는 5대의 푸드트럭은 모두 채 씨처럼 지원을 받은 탈북자가 운영하는데, 그중 직접 만든 음식을 파는 곳은 꿈꾸는마차 하나뿐이다. 아침 일찍 나와 준비하고, 끊임없이 맛을 연구하는 걸 보면서 단골손님도 많이 생겼다. 요즘은 보통 주말 3일 동안 200만~250만 원의 매출을 올린다고 한다. 그는 재단 지원이 2년간이므로, 그 후에 식당이든 빵집이든 밀가루를 이용한 메뉴를 선보일 생각을 하고 있다. 시간을 쪼개 숭실 사이버대학 외식창업경영학과에서 식품법과 위생법도 배운다.

“경마장에 나오면 하루 종일 즐거워요. 손님들이 아이스크림 사다 주고, 초콜릿 가져다주고, 샌드위치 먹으라고 해요. 3일 내내.”

호떡을 굽고 있는 채 씨에게 한 손님이 말을 건넨다. “빌딩 살 것 같아요! 몇 채 살 거예요?” 그는 “빌딩이 아니라 나라를 사야 할 것 같아요”라고 재치 있게 받아친다. 그는 경마장을 찾는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오는 사람들이라며 미소를 짓고 칭찬해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호떡을 주문하는 손님이 “운이 안 좋았다”고 하면 음료수나 어묵을 서비스로 주며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길 테니 힘내라”고 응원한다. 그러면 울상으로 왔던 손님들도 웃으며 돌아간다고 한다.

▲ 채 씨가 푸드트럭 뒤편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 렛츠런재단

경쟁 심해 힘들지만, ‘뭐든 할 수 있는 자유’는 소중

“북한은 아첨하면 살고 못 하면 못 살아요. 돈이 많든가 권력이 있다든가.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경우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면 다행이에요. 남한은 자유가 있어 좋지만 사는 건 더 치열해서 힘들었죠.”

그는 남한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아들을 낳았고, 중국에서 데려온 딸 둘과 함께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꿈에서 만나며 늘 그리워하고 있다. 슬픈 노래를 듣거나 진달래꽃을 보면 떠나온 고향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통일을 소망한다고 한다.

채 씨는 최근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 미사일실험에 대해 “가난해서 업신여길까 봐 군사라도 강하게 보이려 과시할 뿐”이라며 “김정은 위원장 자신이 호화로운 생활을 버릴 수 없어 전쟁은 일으킬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또 현재 3만 명을 넘어선 탈북자 수가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며, 그로 인해 통일에 도움 되는 변화가 있을 것이란 희망을 피력했다.


편집 : 조은비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