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김한솔 KBS PD
주제 ② 팩추얼 드라마를 제작하는 PD란?

올해 휴스턴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은 KBS의 <임진왜란 1592>가 차지했다. 영국 BBC 드라마 <셜록> 같은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얻은 쾌거다. <임진왜란 1592>는 KBS가 2016년 9월 3일부터 23일까지 총 5부작으로 방영한 국내 최초 팩추얼 드라마(Factual Drama)다. 사실에 입각한 스토리와 화려한 영상미로 국내외 시상식에서 인정받았다. 휴스턴영화제 특별상 말고도 한국방송대상 대상, 뉴욕TV&필름페스티벌 작품상 금상과 촬영상을 받았다.

휴스턴영화제 수상 직후 쏟아진 세 유형의 질문

“처음엔 휴스턴국제영화제에서 ‘왜 <셜록>을 안주고 <임진왜란 1592>한테 상을 줬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임진왜란이라는 콘텐츠의 힘이 작용했다’는 거예요.”

김한솔 PD는 <임진왜란 1592>가 해외 유명 콘텐츠를 제친 이유를 고민하다 ‘콘텐츠의 힘’이라는 답을 찾았다. 휴스턴영화제 수상 이후 외국 연출가들에게 받은 세 가지 질문 덕분이다. 첫째, 거북선이 실제로 존재한 배인가? 둘째, 해전은 보통 원거리에서 대포를 쏘는 형태인데 이순신은 정말 바다 위에서 근접전을 했나? 셋째, 이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은 역사적 사실인가? 김 PD는 세 가지 질문에 모두 ‘Yes’라고 대답했다.

▲ 팩추얼 드라마의 기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한솔 PD. © 박진홍

“외국 사람들은 거북선 같은 디자인과 기능이 있는 배가 400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라고 해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그림책이든 어디에서든 접하니까 잘 모르는데, 외국인들은 그런 걸 처음 보거든요. 미국과 유럽에서 거북선을 꼭 다시 보고 싶다는 말까지 하더라고요.”

104부작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 17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명량>(2014) 등 국내 방송, 영화계에서 임진왜란 관련 콘텐츠는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1592>만이 가진 차별점이 있다. 철저히 역사 기록에 기반한 ‘트루 스토리’라는 점이다. 김 PD는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임진왜란, 즉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는 ‘콘텐츠의 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 ‘트루 스토리’라는 점이 <임진왜란 1592>를 국내외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팩추얼 드라마를 만드는 세 기준

팩추얼 드라마는 인물, 사건, 배경, 주인공의 대사까지 역사 기록에 근거해 만든다. 외국에서는 꽤 성행하는 장르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장르다. 김 PD는 과거 <역사 스페셜> <추적 60분> 등 정통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PD였다. 그에게도 팩추얼 드라마 제작은 “무모한 모험이자 불확실한 도박”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제작에 앞서 ‘다큐멘터리, 드라마, 재연드라마’와 차별화하기 위한 기준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김 PD가 세운 첫 번째 기준은 철저히 사실에 입각한 영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단, “단순히 사실만 나열한 영상은 교과서를 영상으로 찍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두 번째 기준은 “반드시 사실 안에서 재미있는 인물과 스토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세웠다.

“KBS 드라마 <7일의 왕비>가 사극일까요? 아니면 최근 개봉한 영화 <덩케르크>가 사극일까요? 저는 둘 다 사극이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좀 다르죠. <7일의 왕비>는 단경왕후라는 인물이 주인공인 사극입니다. 역사는 배경으로 쓰이죠. 하지만 <덩케르크>는 인물보다는 역사가 주인공인 사극입니다. 주연 배우인 톰 하디가 영화 내내 마스크를 쓴 채 얼굴을 가리고 등장할 정도로 ‘인물을 보지 말고 역사를 봐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어요.”

<임진왜란 1592>는 <덩케르크>처럼 인물보다는 역사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 안에 이순신 장군이라는 인물과 거북선, 또는 12척의 판옥선을 활용한 해전 스토리가 있다. 김 PD는 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흐름, 기적 같은 해전의 흐름을 사실에 기반해 그려냈다. ‘사실’과 ‘재미’를 모두 잡는 것. 김 PD가 만든 팩추얼 드라마의 강점이자 차별점이다.

김 PD가 마지막으로 세운 기준은 ‘역사의 빈 부분을 잘 채워나가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사실을 쫓다 보면 기록 속 비어 있는 부분, 기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때문에 기록의 한계를 보완할 방책이 필요했다. 김 PD는 “역사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은 합리적 추론, 스스로 임진왜란 당시를 떠올려보는 작가적 상상력이 그 보완책이었다”고 설명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인기 장르인 팩추얼 드라마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 팩추얼 드라마는 인기 장르로 꼽힌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미국 방송사 HBO에서 2001년 방영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 이지중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벌지 전투 등을 실제 부대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BBC도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목격담에 기반한 3부작 드라마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를 지난 2014년 제작한 바 있다.

▲ 영화 같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전쟁 장면. ⓒ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스틸컷

김 PD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아워 월드 워>에는 마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전쟁 장면이 등장한다”며 “실제 <아워 월드 워>의 제작비는 할리우드 전쟁영화 수준”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드라마 제작비는 ‘해당 작품이 얼마나 흥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따라 달라진다. 주어진 제작비가 많을수록 드라마가 흥행할 것이라는 방송사의 믿음이 있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팩추얼 드라마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팩추얼 드라마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임진왜란 1592>를 제외하면, 최근 개봉한 영화 <박열> 정도가 대표적이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초반 ‘이 영화는 철저한 고증을 거친 실화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존 인물입니다’라며 두 번이나 자막을 넣었다. 사실에 기반한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김 PD는 “영화 쪽에서는 <박열>이 팩추얼 드라마 장르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수했고, 성공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영국 BBC에는 팩추얼 담당 부서가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팩추얼 드라마 연출에 참여하고 있다”며 “앞으로 국내에서도 이 장르가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역사 콘텐츠 제작시 피해야 할 것은 ‘역사 엄숙주의’

세계적 흥행을 일으킨 일본의 서바이벌 액션 게임 <귀무자>에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실존 인물들이 괴물로 등장한다. 만약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 게임 등의 콘텐츠에서 이순신 장군이 괴물로 변신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 PD는 “그 누구도 그런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을 것”이라며 “물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만 역사 콘텐츠에서도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어느 정도 상상력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에 기반 한 콘텐츠를 제작하다 보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역사 엄숙주의’다. 다른 말로 하면 ‘팩트 지상주의’ 또는 기록되어 있는 것만 진리라는 ‘역사 폐쇄주의’다. 김 PD는 “역사를 ‘오로지 팩트’라는 작은 울타리에 가둬버리는 것은 박제된 시체로 전락시키는 행위”라며 “역사 콘텐츠 제작자들은 ‘역사 엄숙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팩추얼 드라마뿐 아니라 ‘가상 시나리오’나 ‘페이크 다큐’ 등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한 장르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습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모 방송에서 페이크 다큐를 시도했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어요. 너무 정확한 고증에만 집착하기 때문인데요. 기록된 역사는 그대로 표현하되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의 빵틀에 어떤 재료를 찍어낼 것인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요리와 똑같아요. 도미를 재료로 쓰면 도미 요리가 나오고, 오징어를 재료로 쓰면 오징어 요리가 나오죠. 요리 솜씨로 도미를 오징어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팩추얼 드라마를 기획할 때도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소재를 재료로 쓸 것인가’입니다.”

그동안 KBS에서 만든 대하사극들은 대부분 <불멸의 이순신>(2004~2005), <대조영>(2005~2007), <대왕 세종>(2008), <광개토대왕>(2011~2012), <정도전>(2014), <장영실>(2016) 등 한 명의 영웅적 인물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하지만 <임진왜란 1592>는 달랐다. 이순신 장군이라는 인물이 아닌 임진왜란이라는 사건 자체를 극의 중심 소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 <불멸의 이순신>의 포스터(좌)를 보면 드라마의 중심소재가 이순신 장군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임진왜란 1592>의 포스터(우)에서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중심소재임을 나타내고 있다. ⓒ KBS

덕분에 <임진왜란 1592>는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나 일대기에 국한하지 않고, 임진왜란을 둘러싼 조선, 명, 일본, 삼국의 관점을 객관적이고 생생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동안 전쟁의 원흉으로만 묘사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전쟁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조명해 참신하다는 평도 받았다. 김 PD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것만큼이나 같은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팩추얼 드라마의 소재로 임진왜란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PD는 빵틀입니다. 빵을 만들 때 하트모양 틀을 사용하면 하트 빵이 나오잖아요. PD는 소재를 가져와서 자신만의 빵틀에 찍어내는 사람이에요. 하트빵틀에 빵이 아닌 수박을 찍어내도 모양은 하트잖아요. 그 틀의 모양이 바로 그 PD의 특색이죠. 하지만 간과하면 안 될 부분이 대중이 좋아하는 소재를 파악하는 겁니다. 대중이 원하는 게 빵인지 수박인지를 알아야 해요. 대중은 무형의 생물이라,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들에게 꾸준히 검증받아야 좋은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큐에서 팩추얼 드라마, 이제는 TV에서 영화로

김 PD는 또다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2004년 KBS에 입사한 이래 10년 넘게 다큐멘터리 PD로 살던 그가 팩추얼 드라마를 만들었던 것처럼, 지금은 드라마에서 영화로 도약을 준비중이다. 이번에도 소재는 임진왜란이다. 단, 이번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사건 자체가 아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집중한다.

“TV에서는 극 중 대사가 중요하지만 스크린에서는 대사보다 화면이 중요해요. 말로 때우지 말고 정말 관객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거북선을 소재로 한 해전을 보여주려면 영화가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TV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전쟁장면이라 해도 영화만큼 느낌이 안 나오거든요. 영화적 도전은 이런 겁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 장사진 등 육지에서 사용하는 진법을 바다 위에서 구현했다. 전기모터가 아닌 병사들의 노 젓기로 배를 움직이던 시대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진법을 배로, 그것도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서 펼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 PD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잘 반영한다면 스크린에서 역대 최고 해전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새로운 플랫폼에 도전하는 포부를 밝혔다.

“해전은 바다 위에서 배와 배가 싸우는 겁니다. <캐리비안의 해적> 등 기존 영화에서 해전을 보여줄 땐 배 위에서 사람이 싸우잖아요. 하지만 해전에서는 사람이 아닌 배가, 병사들이 움직이듯 진법에 따라 움직여야 해요. 배 한 척이 육지전의 병사 한 명이 되는 거죠. 반지의 제왕이 육상전투의 끝을 보여줬다면, 저의 귀선은 해상전쟁의 끝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7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희진 김한솔 신형철 나영석 이택광 유진룡 김종철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박수지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