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김한솔 KBS PD
주제 ① <임진왜란 1592>와 영화 <귀선> 제작기

"여러분도 항상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이 있잖아요. 임진왜란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자니 너무 많이 만들어졌고, 드라마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장르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한솔 KBS PD는 <임진왜란 1592>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팩추얼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팩추얼 드라마(Factual Drama)'는 사실의 재해석이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며 스토리를 엮어나가다 보면, 그 중간에 어떤 기록도 없는 '빈 공간'이 생긴다. 9월 15일 서울 대학로 민송아트홀에서 열린 특강에서 김 PD는 "빈 공간을 합리적 추론을 통해 채워나가는 게 팩추얼 드라마이며, 다큐멘터리와 차별되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역사적 사실 위에서 상상하라"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왕은 사랑한다> 같은 기존 역사드라마는 작가들이 선호하는 캐릭터를 마음속으로 정하고 배경을 고릅니다. 제가 했던 스토리텔링은 취재를 바탕으로 새로운 '팩트'를 발굴하는 게 첫 번째였고, 그 바탕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에서 조금 다릅니다."

▲ 김한솔 PD가 팩추얼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사실 발견'이었다. ⓒ 고하늘

김 PD는 <임진왜란 1592>를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 표현했다. 이제껏 없던 장르로 시작하려면 우선 개념부터 바로 세워야 했다. 그는 대본을 쓰면서 팩추얼 드라마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여기에 근거해 스토리로 엮어가는 것'이라는 기준부터 세웠다. 우선 사실 발견부터 시작했다. <난중일기>와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임진장초(壬辰狀草)>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状)> 같은 장계 등 기록을 통해 이순신을 '인터뷰'했다. 그러다 보니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지점이 보였다.

"<임진왜란 1592>를 제작할 때 거북선 세트를 만들었습니다. 기록에 근거해 만든 거북선 머리를 붙이려고 했는데, 크기가 커서 다섯 명이 들어도 달 수가 없었어요. 그걸 보면서 '이순신 장군은 머리를 왜 붙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먹을 밥도 모자라던 시기에 그렇게 힘들게 붙였다는 거면 분명히 용도가 있지 않을까요?"

김 PD는 이렇게 궁금증이 드는 지점을 '단초'라고 표현했다. 스토리를 만들 때 역사적 사실이 바탕에 있으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는 생각을 뒤집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 아주 작은 단 하나 실마리만 있어도 상상은 무한히 할 수 있다고 김 PD는 강조했다. 그는 기획중인 영화 <귀선>도 이 원칙을 활용했다. 조선 시대 화포 천자총통(天字銃筒)에 넣고 쏘던 대장군전(大將軍箭)이라는 화살이 있다. 길이만 2m70cm인 '조선판 미사일'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진 일본 수군 무장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후손 집에서 400년 만에 발견됐다. 김 PD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미사일을 가보로 남겼다는 것'과 '붙이기 힘든 거북선 머리를 굳이 붙였다'는 두 가지 단초를 중심으로 영화 <귀선>을 풀어나가고 있다.

두 가지 추론으로 임진왜란의 '블랭크'를 채우다

"이순신 장군은 두 번 총을 맞았어요. 거북선이 첫 출전한 사천해전, 그리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인데, 전투를 묘사한 기록이 별로 없어요. 최종병기인 거북선이 출전했는데 왜 장군이 총을 맞았을까요? 또 기록을 보면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았음에도 끝까지 전쟁을 독려했다', '팔꿈치를 따라 피가 계속 흘렀음에도 활 쥔 손을 풀지 않았다'는 말이 나와요. 왜 장군은 총을 맞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이 들어갔을까요?"

김 PD는 기록이 없는 역사의 빈 공간을 '블랭크(Blank)'라고 표현했다. '블랭크'를 메우려면 합리적 추론이 필요하다. 그는 '역사적 추론'에 '감정적 추론'을 합치는 것을 합리적 추론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임진왜란 1592>를 만들 때 첫 번째 블랭크는 거북선 전문가를 만난 자리에서 나왔다. 거북선은 돌격선이다. 돌격선은 전투를 시작한 즉시 적군 사이를 파고들어 적진을 흔들어 교란하는 역할을 한다. 판옥선 본대가 진을 치고 포를 쏠 수 있을 때까지 선두에서 버텨야 한다. 대장선에 탄 이순신 장군은 먼저 들어간 거북선보다 뒤에 있는 게 정상이다. 그런 장군이 총을 맞았다.

▲ <임진왜란 1592> 1편에 등장하는 거북선 설계도에는 당시 실제 전법인 '귀선선돌 판옥차진'이 적혀 있다. ⓒ <임진왜란 1592> 화면 갈무리

당시 조총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히려면 최소 50보 안에는 있어야 했다. 장군이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왜 들어갔을까?" 김 PD는 취재를 이어갔다. 전문가에게서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먼 거리 적을 맞히기는 현대전에서도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항해부터 포 조준, 발사까지 모든 전투 과정을 사람이 직접 해야 했던 임진왜란 당시라면 훨씬 어려웠을 거라고 추론할 수 있다.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 추론'에 김 PD는 '감정 추론'도 더했다. 감정 추론은 역사적 추론으로 얻은 장면 속 인물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작가로서 상상해보는 과정이다. 이순신 장군에게 임진왜란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이었다. 한 전투에서 이긴다고 끝이 아닌 상황에서 장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김 PD는 "장군은 절체절명, 즉 한 번도 지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압박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라며, "그 속에서 나온 '다시는 지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과 모험을 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감정 추론 과정을 밝혔다.

▲ <임진왜란 1592> 2편에 등장하는 근거리 전투 장면. ⓒ <임진왜란 1592> 화면 갈무리

김 PD는 역사 추론과 감정 추론을 종합해 임진왜란 수군 전투는 근거리 전투였다는 결론을 냈다. 장군이 50보 내에서 총을 맞았고 원거리에서는 포를 명중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이기기 위해 적선 가까이 다가 가봐야겠다는 절박한 장군 심정을 '상상'해 더한 결과였다. 지금까지 임진왜란을 다룬 콘텐츠에서 그린 원거리 타격 장면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총을 맞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블랭크'를 메운 순간이었다. 거북선이 앞장서 돌격하고, 뒤따라 온 판옥선이 적선 가까이 붙어 포를 쏘아 궤멸시키는 <임진왜란 1592> 속 명장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또 하나의 블랭크, 이름

"이순신 장군이 쓴 장계 원본을 봤는데, 다 이름들만 있더라고요.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가 열심히 싸웠다', '아무개가 몇 명을 죽였다'는 식이었어요. 같은 시기 다른 장수들이 쓴 장계는 그렇지 않았어요. '내가 열심히 해서 성공했다'가 표준이었죠. 그 말을 듣고 '아, 이 형 너무 심한 히어로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두 번째 블랭크는 '이름'이었다. 이순신은 장계에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을 본 바대로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역사학자들은 '이순신 장계의 특이점에 관한 고찰' 같은 논문이라면 모를까, 역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김 PD는 납득할 수 없었다. 장계는 일기가 아니라 신하가 왕에게 중요한 일을 보고하던 문서다. 분명 장군이 자기가 세운 공은 지우고, 그 자리에 노비와 말단 사병 이름을 빼곡히 기록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에요. 임진왜란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순신 장군이 장계에 쓴 모든 이름 가진 이들이 함께 싸운 전쟁이에요. 성공한 CEO나 리더가 한 사람 한 사람 공을 다 기억하는 것처럼, 장군도 장계에 쓴 이름들이 잊히지 않길 바란 것 같아요."

이름의 의미를 찾아낸 김 PD는 이순신 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임진왜란 1592>에 등장하는 모든 단역, 격군(노 젓는 사람) 하나하나에 이름을 다 붙였다. 새로 지은 게 아닌, 실제 장계에 쓰여 있는 이름이었다. 등장인물 중 이름이 없는 건 단 한 명, '막둥이 아빠'다. 그는 머리에 왜군이 쏜 총을 맞은 아들 '막둥이'를 지게에 지고 경상도에서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까지 걸어온다. 귀선(거북선) 돌격장 이기남은 군율을 어기면서까지 막둥이 아빠를 군영으로 불러들이고, 이순신 장군은 이를 모른 척한다. 나중에 귀선이 첫 출정에 나설 때, 막둥이 아빠는 이기남 앞에 뛰어와 노를 잡게 해달라고 외친다. 막둥이는 이미 죽은 뒤였다.

▲ <임진왜란 1592>에서 '막둥이 아빠'는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등장 인물이다. ⓒ <임진왜란 1592> 화면 갈무리

막둥이 아빠는 <임진왜란 1592>에서 유일한 픽션이다. 모티브는 2005년 6월 부산 지하철 공사장에서 나온 임진왜란 당시 유골에서 따왔다. 유골은 처참했다. 20대 여성은 무릎을 꿇은 채 두개골이 대각선으로 잘려져 있었다. 김 PD는 이 광경을 '동래성 학살', '조선판 홀로코스트'라 표현했다. 특히 뒤통수에 총 맞아 죽은 다섯 살짜리 아이 유골은 그를 가장 마음 아프게 했다. 김 PD는 "이 아이는 꼭 드라마에 등장시키고 싶었고, '이 아이도 아빠가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막둥이'와 '막둥이 아빠'를 만들었다"고 극본 쓰던 때를 떠올렸다. 이렇게 두 가지 추론으로 역사의 블랭크를 채우고,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인물을 만든 게 임진왜란을 '팩추얼 드라마'로 그려낸 김 PD의 비결이다.

인물 재해석으로 다시 태어난 이순신과 히데요시

"<난중일기>를 읽는데, 이순신 장군은 정말 아팠더라고요.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서 밤마다 술을 먹고, 다음날 힘든데 전쟁 나갔다가 돌아와서 코피 세 홉을 흘리고 토하고 설사하고. 있는 그대로 이순신을 그리자는 생각에 기록을 토대로 캐릭터를 키워드 4개로 좁혀봤어요. 술, 토사곽란, 악몽, 코피."

<불멸의 이순신> 김명민이나 <명량> 최민식처럼, 기존 이순신을 다룬 콘텐츠에서는 군율에 엄격하고 전투에 이길 방법을 근엄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김 PD는 '사실적인 이순신'을 목표로 잡았다. 영웅 이순신이 아닌, 난중일기 내용처럼 힘들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있는 그대로 이순신을 그리고 싶었다. 이순신 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어떤 이순신이 돼야 합니까"라고 묻는 배우 최수종에게 김 PD는 "두려움에 떨며 삶과 죽음의 원초적 고민을 하고, 자신이 죽으면 모두가 죽는 압박감에 떠는 이순신, 지금으로 치면 지하철 1호선 막차 타고 가는, 술에 절어 있는 50대 가장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배역을 수락한 최 씨는 촬영 내내 제작진에게 더 늙고 초췌하고 어두운 이순신 장군으로 그려달라며 연기에 몰입했다.

"<명량>에서처럼 마초적이고 파괴력 있는 이순신도 이순신이에요. 저는 "우리는 왜 싸우는가"라는 부하들 질문에 답변하지 않다가 그저 "죽지 마라"는 말을 하는 인간적인 이순신도 이순신이라고 생각했어요. 해석의 차이인 거죠."

김 PD는 시청자들이 유약한 이순신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동시에 '바로 저거야', '나도 저래'라는 반응도 있을 것이라 믿었다. 판단은 시청자 몫으로 남았지만, 그는 시청자들이 <임진왜란 1592>를 보면서 역사의 한 장면과 내 삶의 한 장면이 함께 어우러지는 순간 동질감을 느끼길 바랐다. 영화 <귀선>에서는 또 다른 이순신에 도전한다. 강연에서 '싸움을 끝낸 맹수가 다음 싸움을 준비하듯 앉아 있는 이순신', '빼곡히 박힌 이두박근을 지나 진물이 팔 근육을 타고 흐른다'는 <귀선> 시나리오 지문을 일부 공개한 그는, 뒤에서 본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처럼 듬직하게 적 공격을 막는 '전사 이순신'을 그려 낼 생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중 명대사인 '전쟁은 기회다'에 꽂혀서, 전쟁을 기회로 삼아 이득을 추구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어요. 기록에 없는 대사지만 실제로 바늘장사로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팩트를 찾았기 때문에 가능했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은 비극이 아닌 거예요."

▲ <임진왜란 1592> 3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전면에 내세웠다. ⓒ <임진왜란 1592> 화면 갈무리

김 PD는 <임진왜란 1592> 3편에서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묘사했다. 이전에는 급한 성품과 잔혹한 성격으로만 나왔던 히데요시를 김 PD는 역사 기록을 토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렸다.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원숭이'라 불리며 천대받으면서도 호시탐탐 출세 기회만 엿보던 어릴 적 모습, 전쟁을 위해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조총을 차근차근 비축하는 모습은 인간 히데요시의 욕망과 치밀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히데요시를 '무조건 나쁜 놈'이 아닌, '이해가 되는 나쁜 놈' 혹은 '구체적으로 나쁜 놈'으로 보여주는 게 김 PD가 강조한 부분이다. 의도는 적중해 히데요시를 그린 3편은 시청자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히데요시를 연기한 김응수 씨는 방영 이후 '응신수길(김응수+풍신수길)'이란 별명까지 생겼다.

김 PD는 3편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한 편을 할애한 이유를 묻는 말에 "누가 나를 때렸는데, 나를 왜 때렸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그때 우리의 적이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돌아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임진왜란 300여년 뒤 조선은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에 들어와 샴페인을 터트리며 '지금 달을 임진왜란 제2 선봉장 가토 장군이 봤다면 감회가 어땠을까'라는 시를 지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 최측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땅에서 깨워보리라"는 답가를 썼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히데요시가 다시 깨어나는 일은 없어야 하기에 히데요시를 치밀하게 해석해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김 PD는 역설했다.

왜 다시 임진왜란인가?

김 PD는 "<임진왜란 1592> 제작을 앞두고 영화 <명량>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2014년 개봉한 <명량>은 누적 관객 1,761만 명으로 역대 한국 영화 관객 수 1위를 차지했다. 연출가에게 이미 대성공을 거둔 전작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부담이다.

"그런데 <명량> 이전에는 없었을까요?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은 많았고,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무려 104부작으로 이순신을 그려냈어요. 이순신 역을 맡은 김명민 씨는 '영원한 이순신 장군님'이란 찬사까지 들었어요. 전작이 있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연출가에게는 새로운 이순신을 발굴해 '허들'을 뛰어넘는 것도 또 하나의 매력이죠."

▲ 김 PD는 이순신을 다뤄 성공한 전작들을 '허들'이라고 표현했다. ⓒ 박진홍

김 PD에게 이순신과 임진왜란은 뛰어넘을 '허들'이자 '계속해야 하는 아이템'이다. 7년 동안 3개 나라가 전쟁을 했다. 수많은 사람이 싸우고 다치고 죽은 과정 속에는 아직 다루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전쟁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삶에 대한 절실함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전쟁이라는 소재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김 PD는 말한다. 매력보다 중요한 이유는 '역사'다. 김 PD는 다이어리에 <임진왜란 1592>의 주제를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적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을 반복해서는 안 되기에, 임진왜란은 계속 다루고 해석해야 한다고 김 PD는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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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양영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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