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안윤석PD

모든 게 ‘사이먼’ 때문이다. 1993년 IBM이 사이먼을 처음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애플 아이폰, 삼성 갤럭시와 같은 스마트폰은 나오지 못했을 거다. 사이먼은 미국판 ‘~가라사대 게임'처럼 인간이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미국은 한국의 ‘가라사대 게임'을 ‘사이먼 게임'이라 부른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심은 것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은 타인의 쉴 수 있는 시간, 지루함, 멍 때리기, 수면 등 어쩌면 삶의 여유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빼앗아 버린다. 이제는 전 세계가 시름하게 된 이 바이러스. 프랑스는 이를 ‘상시 업무 중’이라 이야기한다마는 난 이를 ‘넵 유도 바이러스’라 칭하겠다. “넵”이란 단어를 듣지 않는 이상 감염자들이 물러나지 않아서다.

추석 연휴에도 일한 나다. 10월 7일 이날은 연휴라서가 아니라 토요일이라서 쉬는 날임을 미리 밝혀둔다. 난 고향에도 내려가지 못했다. 송편 생각이 간절했다. 9시 정각. ‘카톡’이 울린다. 한번이 아니다. ‘카톡, 카톡, 카톡...’ 쉴 새 없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스마트폰 미리 보기엔 “이 대리, 바쁘나? 다음 주 수요일 제출할 보고서는 완료됐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발신자를 보니 김 차장이다. 차분히 송편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러나 곧 불안해진다. ‘월요일에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서다. 일주일의 시작이 편하려면 답해야 한다. “월요일에 마무리하려 합니다.” 내 말이 나감과 즉시 돌아오는 김차장의 대답. “오늘 해줬으면 좋겠는데..”

점 두 개 주제에 함축성이 대단하다. 저 “..”에는 ‘지금 내가 말한 보고서를 쓰지 않으면 월요일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협박과 후배를 배려하는 것 같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좋게 말할 때 보고서를 써서 당장 보내’란 강제성이 함축되어 있다. 햄릿의 고뇌가 순간 뇌리에 스친다. “보고서를 쓰고 살 것인가, 무시하고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고민 끝에 전자를 선택하기로 한다. 김 차장에게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넵!” 느낌표까지 붙여가며 답했다. 난 감염자 김 차장을 퇴치했으나 지금 당장 보고서를 써야 한다. 피로 물든, 이긴 것 같지 않은 찝찝한 승리였다.

▲ 주말에도, 휴일에도, 저녁에도, 새벽에도 ‘넵’이란 대답을 해야 카톡방의 대화는 종료된다. ⓒ On style <열정 같은 소리하네> 화면 갈무리

소중한 주말 중 하루가 이렇게 날아갔다. 오늘 계획은 혼자 송편을 만들어 먹으면서 <무한도전>을 보고, 읽지 못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도 읽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멍도 때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거였다. 일주일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군중 속에 치여 산 나. 오늘만이라도 나만의 시간을 갖겠다는데 ‘넵 유도 바이러스’가 내 고독의 권리를 빼앗아 가버렸다.

주말에도, 휴일에도, 저녁에도, 새벽에도 ‘넵’이란 대답을 해야 연결이 종료되는 이 “넵 유도 바이러스”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프랑스에선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으로 지정해 이 바이러스를 퇴치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모든 게 사이먼 때문이다. 사이먼, 내 시간을 돌려줘.


편집 :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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