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개인 공간’

▲ 남지현 기자

‘개인 공간(personal space)’이라는 문화적 개념이 있다. 타자와 나 사이에 지켜야 할 적정거리를 말한다. 이를 어기고 지나치게 가까이 상대에게 다가서면 그의 ‘개인 공간’을 침범한 것으로 여긴다는 건데,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 더욱 널리 쓰이는 개념이다. 물리적 거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어서 남의 물건을 만지거나, 어깨 너머로 상대방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을 하는 행위 역시 개인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무례한 행위로 여겨진다.

‘개인 공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에게만 관찰되는 게 아니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동물 역시 ‘개인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모든 온혈동물은 독립적 개체로 성장하기 이전까지 체온 보호 등 생존과 연계된 이유로 형제나 부모와 살을 맞대는 접촉을 필요로 하는데, 개, 고양이, 독수리, 말 같은 ‘비접촉 종들(non-contact species)’은 성장이 끝나 독립하는 순간 다른 개체와 적정거리를 두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개인 공간은 사람 뿐 아니라 동물도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전선 위의 새들도 임계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 pixabay

흥미로운 것은 동물들이 이런 거리를 유지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홀은 한 지역에 특정 개체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과밀현상이 생겨 동물들 간 적정거리가 파괴되면, 개체의 출산율이 떨어지고 사망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먹이가 부족해지는 것은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뿐이고, 동물들이 겪는 신체적, 감정적 스트레스가 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생태학자 콘래드 로렌츠는 척추동물 간 공격성이 이렇듯 생존에 핵심적인 ‘개인 공간’ 확보에 유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거리를 인지하는 과정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온도감지 같은 감각적 기관의 복합적 작용과 개인이 얼마나 친밀하고 집단적인 문화에 소속되었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그 때문에 주거 공간 사이에 여가 공간과 야생 환경을 적절히 배치해 시민들이 인지하는 개인 간 거리를 넓혀줘야 도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구 과밀에 따른 스트레스와 병리 현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느끼는 적정 ‘개인 공간’의 범위가 모두 다르므로 이를 반영한 도시설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홀은 주장했다. 홀은 도시화로 인구가 과밀해져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봤다. 그는 미국의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분별하게 계획 없이 증식하는 도시가 인구과밀을 불러오고, 인구과밀은 신체적, 사회적 병리현상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홀은 ‘개인 공간’을 확보해주는 철저한 도시 계획이 필요하고, 공원이나 녹지 같은 여가 공간과 ‘야생 환경(primitive outdoors)’을 보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50여 년 전 홀이 미국 도시에 남긴 제언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용하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15년 도시계획현황 통계에 따르면 인구의 49.4%가 수도권에 집중되어있다. 수도권인 인천을 제외한 5개 광역시 인구를 모두 합쳐도 전체 인구의 19.7%에 불과하다. 2007년에 수도권 인구는 전체의 48.6%였다. 국토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 지역으로 인구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가 수도권 인구 순유출을 발표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수도권이 경기도 밖으로 광역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인구의 수도권 집중 현상은 의미 있는 다른 현상들을 동반했다. 2007년 대비 2015년 수도권 합계출산율은 서울, 경기, 인천 모두 하락했다. 음주율 역시 통계치가 있는 2008년에 견주어 2015년에는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스트레스 인지율은 서울을 뺀 경기도와 인천에서 모두 올랐다.

▲ 도시의 주거 단지는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어 개인적 스트레스와 사회적 병리현상을 유발한다. ⓒ pixabay

홀은 비접촉 척추동물들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지하는 개인 공간의 크기가 달라져서, 약한 개체일수록 강한 개체에 ‘개인 공간’을 양보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도 척추동물의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주거 취약 계층으로 꼽히는 1인 청년 가구의 평균 주거사용면적은 30.4m²으로 9평 남짓으로 영국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오르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계속 더 좁고 열악한 주거 형태로 내몰리는 청년층이 있는 반면 2015년 51채 이상 집을 소유한 가구 수는 3천에 이르렀다. 부동산을 재산증식을 위한 투기수단으로 여기기에 발생하는 기이한 현상이다. 부동산 보유세 부담이 적은 탓에 살지도 않으면서 집을 여럿 보유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큰 집을 과시용이나 매매차익을 노려 붙들고 있는 가구가 많다.

미국은 지난해 무주택 가구 비율이 1965년 이후 최고치인 37.1%를 찍었다. 동시에 미국 가구의 평균 주택 면적은 2000년부터 계속 증가해 2015년 최고치를 찍었다. 집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집을 갖고 집이 없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더 큰 집을 갖게 되고, 집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가 한국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보다 많은 이들이 질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공간으로부터 구별된 ‘개인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개인 공간’인 집이 상위 계층에게만 과도하게 편중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유세를 상향조정하는 등 공개념 관련 부동산 3법을 부활해야 한다. 수직증축 규제를 완화할 게 아니라 용적률 규제를 강화해 빌딩 대신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주거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대선주자들이 내놓은 공공임대주택 확대는 바람직하지만 이러한 부분에서는 미흡하다. 새 정부는 보다 넓은 시각에서 도시계획을 구상해 홀의 제언이 한국 사회에도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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