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역사

▲ 곽호룡 기자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8시. 아일랜드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신이 바로 이 시간에 지구를 만들었다고 1658년 밝혔다. 어셔는 천지창조의 날짜를 알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행적을 뒤쫓는다. 가령 130세에 자식을 나은 아담, 600세에 대홍수를 맞은 노아, 75세에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 등이다. 사람들은 수세기에 거쳐 어셔의 주장을 믿는다.

과학의 발전은 어셔의 학설을 뒤집는다. 과학은 지구가 약 47억 년 전에 형성됐다고 알려준다. 지구형성에 대한 과학이론이 정립된 것은 1896년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케렐이 방사성 이론을 발표한 후다. 지구의 나이는 방사성 물질의 비율과 반비례한다. 오래된 암석일수록 안에 있는 우라늄이 납으로 변한다. 원래 있던 우라늄과 새로 만들어진 납의 비율로 통해 암석의 나이를 알아낸다.

성경을 추적한 어셔의 ‘비과학적’ 태도는 오늘날에 와서는 조롱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어셔가 지구의 나이를 셀 때 단순히 성경의 기록에만 기댄 것은 아니다. 그는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8시’라는 정확한 날짜를 얻기 위해 열린 사고와 합리적인 추론을 거친다. 이를테면 고대민족들의 창조신화가 대부분 가을에 시작한 것을 착안하고, 이집트인들이 태양력을 사용한 점을 빌렸다. 또 날짜를 맞추기 위해 윤년을 평년으로 조정한 그레고리력의 오차를 계산해낸다. 다른 민족까지 연구대상에 포함해 면밀한 고증을 했다는 점에서 그의 방법론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어셔가 남긴 ‘47억 년의 오차’는 아직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알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 아일랜드의 제임스 어셔는 성경의 내용을 토대로 지구가 탄생한 날짜를 계산했다. ⓒ Flickr

그와는 대비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을 이용한 일본 제국주의다. 임나일본부는 4세기 후반 일본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 신라를 지배했다는 설이다. 이것을 가지고 일제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에 힘을 보탠다. 역사학자 김석형은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는 광개토대왕비 일부 내용이 후대에 석회로 덧칠되었다는 의혹을 내세운다. 조작된 역사라는 것이다. 석회 조작설이 아니어도 끊어 읽기와 한자해석에 따라 임나일본부설의 허구가 드러난다.

“모든 역사는 야만의 역사다.” 벤야민의 말은 역사가 지배계급의 권력투쟁과 그에 따른 폭력의 산물이라는 신랄한 비판이다. 권위주의적 권력자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권력유지에 도움이 되는 역사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기 위해 역사에 ‘석회칠’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권력에 대항하는 다른 입장을 낙인찍고 배척할 뿐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와 블랙리스트가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 암석 속 우라늄은 붕괴되지만 부조리한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조롱거리가 된 어셔의 객관적 학문 태도가 역설적으로 빛나 보이는 이유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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