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나이’

▲ 서지연 기자

이틀 뒤면 내가 몇 살인가? 세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지구의 74억 인구가 모두 한 살 더 먹는다고 생각하면 억울할 건 없다. ‘젊어서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늙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오스트리아 작가 장 아메리는 공평하게 늙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탐구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 돌아온 그에게 남겨진 것은 젊음이 상실된 시간뿐이었다. 에세이집 <늙어감에 대하여>에서 그는 늙음에 저항하고 체념하면서 방황하는 보통의 인간을 그린다. 그를 통해 상실된 시간과 늙어감을 직시한다. 우리가 품위 있게 늙어갈 유일한 가능성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 안에 녹아있는 부정에 저항하는 것이다.

늙음은 나이 듦과 다르다. ‘늙었다’는 말은 물리적 나이보다 사회적 나이에 가까운 표현이다. 장 아메리가 말하는 ‘타인의 시선 안에 녹아있는 부정’, 즉 고정관념들이다. 다이아몬드를 탐하거나 도전을 즐기는 노인은 추하니 이 모든 욕구는 젊은이를 위해 내려놓고 곱게 늙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들이다. 미국 정신의학자 로버트 버틀러는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오는 차별을 ‘연령주의’라 불렀다. ‘연령주의’는 반대로 미성년자는 변별력이 없으므로 법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차별마저 생산해낸다.

‘연령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개별성을 회복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하루 8시간 넘게 운전대를 잡고도 제 월급에서 사납금 맞추느라 겨우 월 50만원 받아가는 노인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는가? 자식 보육을 끝낸 여성들은 온몸에 파스를 두르면서 최저임금도 안 주는 곳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일쑤다. 이마저도 몸이 건강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노동 유연성이 낮으면서도 사회안전망이 없는 한국의 많은 중장년층에게 퇴직 후 재취업은 언감생심이다.

▲ 노동유연성이 낮고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에서 잘 늙기란 언감생심이다. ⓒ Flickr

사회∙경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개저씨’의 등장은 흥미롭다. 경제권력으로 제일 상층에 있는 50-60대 남성들을 혐오 또는 조롱하는 사회적 ‘언어’가 생겼다는 점에서다. 그들은 레임덕에 빠진 현직 대통령쯤 될까?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문화적으로도 늙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에 도움도 안 되고 젊은층에게 노인복지의 부담이나 떠안기는 늙은이 취급받기 십상이다. 나는 과연 잘 늙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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