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자선

▲ 곽호룡 기자

<뉴욕타임즈>는 작가 폴 오스터에게 크리스마스에 실을 단편소설을 써달라고 의뢰한다. 감상적인 이야기는 빼달라는 요구를 덧붙여서. 오스터는 툴툴거린다. “대체 크리스마스에서 '감상'을 빼면 뭐가 남는단 말인가.” 오스터의 불평처럼,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은 인간애가 묻어나는 따뜻한 이야기를 바란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말이다. 구두쇠 부자 영감의 전형 스크루지. 그는 고독하게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개과천선한 스크루지의 선행처럼 크리스마스는 구세군의 종소리, 익명의 기부자, 연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선’문화다.

▲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 Flickr

자선(charity)의 어원은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로 ‘신의 사랑’을 가리킨다. 또 자선(慈善)의 ‘자(慈)’는 자식에게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드릴 때 미륵을 ‘자씨(慈氏)보살’로 번안한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미륵은 석가의 제자 중 유일하게 인도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이고, 계급을 초월한 선행으로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특히 사랑받는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자선은 내가 가진 것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순수한 마음에 가깝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선행위에 우월한 사람이 그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푸는 오만함이 느껴지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나아가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마음 한 켠에 있는 죄책감을 씻는 행위다. 자선행위가 하필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몰리는 이유가 그렇다.

그런 '자선행위'가 있었다. 2005년 폭로된 X파일사건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그룹에서 특정 대선후보와 검찰에 로비를 했다는 녹취록이 공개된다. 당시 황교안 수사팀장은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녹취가 불법도청으로 이뤄졌다는 ‘독수독과(毒樹毒果)’논리로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버랜드 편법증여 문제도 겹쳐 여론을 의식한 이건희 삼성회장은 8,000억원 사회환원을 약속하고 재단을 설립하는 것으로 갈무리 지었다. 최근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부회장이 출석한 ‘재벌 청문회'를 두고 일부 언론들은 앞다퉈 쓸데없는 일로 한국경제에 악영향을 줬다고 넋두리다. 최순실사태 책임과 재벌위주의 기업구조, 정경유착에 대한 문제제기는 뒷전이다. 오히려 괜히 기분을 상하게 해 기업기부가 줄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며 볼멘소리다.

폴란드 저널리스트 카푸시친스키는 45년간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갔다. 유럽에서 '야만'으로 여겨진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헐벗고 굶주린 땅 아프리카. 아이들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빵과 초콜릿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쓸 볼펜을 원했다. 자선행위에는 위험한 함정이 도사린다. 그것은 사회에 내재한 구조적 문제를 가린다. 죄책감을 달래는 것은 덤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끝나간다. 오늘밤 '회장님'은 구조적 문제를 가린 자구책으로 모든 죄의식을 털어내는 달콤한 꿈을 꿀까?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강민혜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