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재난’

▲ 최효정 기자

재난은 일상이다. 우리는 모두 불안에 떨며 산다. 원전사고나 핵전쟁 같은 국가적 재앙에서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개인적 사고까지 재난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재난을 당할 확률은 저마다 달라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재난과 함께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전쟁을 말하고 기업주나 안전지대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들이 재난방지 비용지출에 인색한 이유는 재난을 당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개인이 재난의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좀 더 안전한 선진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겨 ‘안전신분’으로 진입하는 것밖에 답이 없어 보인다.

영화 <부산행>이 좀비의 습격 앞에 무능하고 이기적인 국가의 모습을 비난하지만 역시 ‘판타지'에 불과한 이유는 비교적 안전을 획득한 기득권 승객들이 이기적인 선택으로 결국 좀비에게 먹힌다는 ‘권선징악'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나온 현실에서는 좀비 바이러스의 유행보다, 일말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믿음이 더 우스운 것으로 생각돼왔다.

▲ 영화 <부산행>에서는 이기적 행동을 한 사람이 좀비에게 먹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응징을 받는 사례가 드물다. ⓒ 네이버 영화

304명이 수장되고, 젊은 생명이 기차에 치여 죽고, 가장이 에어컨을 고치다 떨어져 죽고,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죽는 잔인함이 효용과 질서의 이름으로 용인되는 세상에서는 징벌은 고사하고 잠시 슬퍼하는 것마저 유난 떠는 것으로 치부된다. ‘보다 근본적으로 구조를 개선해보자’는, 그래서 ‘재난을 예방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말의 성찬만 얼마간 차려지다가 결국 ‘각자도생’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각자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세상도 완전한 개별성을 허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상이 된 재난이 우리를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몰아갈지라도 재난의 문제는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난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함께 복구작업을 하고 함께 방재수단을 격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기심으로 남의 일처럼 보아 넘긴다면, 재난은 절대로 극복될 수 없고 각자도생의 삶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광화문에 서서 망자를 기억하고 재난을 기억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목숨값으로 정치놀음을 한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자신이 아니면 먼 훗날 후손이라도 그런 처지에 몰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재난이 주는 슬픔의 무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알레포든 어디든 폭격의 잔해에서 구출되는 작은 생명이 주는 감동은 슬프기에 더욱 생생하다. 인간의 존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쟁의 한가운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비극이다. 실은 그러고도 깨닫지 못해 비극이 계속된다. 오감으로 타인의 불행과 불안을 공감하는 자들만이 위기의 순간에 서로 손을 맞잡을 수 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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