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월드] 두테르테 신드롬 ② 외교

“2년 안에 외국군대를 모두 철수시키겠다.”

직설화법의 필리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토해낸 폭탄 발언이다. 미국 군대를 철수시켜 종주국으로 여겨지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선포다. 명분은 자주외교.

“나는 미국의 강아지가 아니다. 나는 주권 국가의 대통령이며 필리핀 국민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

난사군도(스프래틀리 제도)에서 벌어지는 미·중간 패권 다툼에서 미국의 힘을 빼는 이 발언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동안 동남아시아에서 패권 유지의 교두보로 필리핀을 활용해 오던 미국은 한 방 맞았다. 주변국들은 화들짝 놀라며 손익 계산서를 두드리느라 호들갑이다.

▲ 필리핀 16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커먼스

탈미국 선언 뒤에 쏟아지는 중국발 27조 경제지원

‘개도 무는 개를 돌아본다’고 했던가. 실리를 물겠다며 달려드는 두테르테식 외교에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두테르테를 달래려 손길을 내민다. 미국과 대척점에 선 중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중국을 찾은 두테르테에게 중국은 화려한 레드카펫을 깔았다. 중국은 두테르테 방중 기간에 150억 달러 투자, 90억 달러 차관 제공 등 총 240억 달러(약 27조 원) 규모의 경제 협력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필리핀에 중국산 고속철도가 깔리는 등 필리핀이 중국 돈으로 물들 전망이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언제였느냐는 듯 두테르테와 시진핑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국제사법재판소 판결로 궁지로 몰렸던 중국은 돈으로 두테르테의 마음을 사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두테르테의 다음과 같은 화답에 중국이 큰돈을 쓰고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엿보인다. “우리(필리핀과 중국)의 관계는 봄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국제적 비난을 사는 두테르테의 인권 없는 ‘마약과의 전쟁’도 협조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해 두테르테의 대중국 신뢰와 의존도는 더 깊어질 전망이다.

일본에 가서도 경제지원 얻어내

거친 표현으로 거부감을 자아내며 대외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은 두테르테의 발언과 정책은 결과를 놓고 보면 정 반대다. 이만저만한 실속을 챙기는 게 아니다.

중국과 역시 대척점에서 경쟁하고 있는 일본에 가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일본 정부는 필리핀의 해상 경비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대형 순시선 2척을 쾌척했다. 낙후된 지역 경제지원용 차관선물도 내놓았다. 특히 두테르테의 고향 다바오시가 속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농업개발에 쓰라며 50억 엔(약 550억 원)의 차관을 두테르테의 손에 들려줬다.

두테르테도 일본에 선물을 준다. 아베 총리와의 회담에서 “일본과 중국의 영토 분쟁에서 항상 일본 편에 설 것”이라고 동중국해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에서 일본을 지원한다는 제스쳐를 보냈다. 일본이 필리핀의 최대 수출 시장임을 감안하면 이 정도 외교 발언은 기본이다. 두테르테 지원 열풍은 조만간 러시아에서도 불어올 전망이다.

▲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과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9월 6일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만났다. ⓒ 위키피디아 커먼스

오바마 ‘피봇 투 아시아’ 정책, 두테르테 ‘피봇 투 차이나’로 가나

두테르테 외교가 아시아 패권 4국 가운데 중국, 일본, 러시아와 밀월관계를 과시하는 사이 미국의 대필리핀, 대아시아 전략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두테르테의 전임자 베니그노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은 중국과 대립하며 미국과 찰떡궁합을 과시해 왔다. 두테르테가 첫 해외 순방국으로 중국을 택한 것과 달리 기존에 필리핀 대통령은 백악관을 먼저 찾았다.

두테르테의 180도 다른 외교 전략은 단순히 말뿐이 아니다. 미국과 해상에서 펼쳐오던 연례 합동군사훈련 마저 끊어버렸다. 오바마의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 : 2000년대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중동에 집중해 온 미국이 외교ㆍ군사정책의 중심을 아시아로 이동시키겠다는 뜻으로, 이는 아시아ㆍ태평양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가 두테르테의 ‘피봇 투 차이나’ 정책에 가로막히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 후 1898년에 체결된 미국-스페인 강화조약으로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다. 서부 잠식을 발판 삼아 19세기 중반 태평양으로 나온 미국이 하와이를 삼킨 데 이어 본격 제국주의로 출발하는 계기다. 그 후 필리핀은 48년간의 식민통치를 받고 1946년 미국으로부터 벗어났다. 1951년 두 국가는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두테르테 미국-필리핀 방위협력확대협정(EDCA) 폐기 위협

2014년 미국 오바마 정부는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맺어 미군이 필리핀 내 군사기지 5곳을 사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오바마 행정부가 필리핀을 거점 삼아 중국의 남아시아 지역 군사팽창을 견제하는 지렛대로 삼았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이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며 EDCA 재검토를 언급하자 위험에 처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의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계속 논란을 일으키는 발언과 필리핀의 의도에 대한 불확실성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실망을 초래하고 있다”고 견제구를 날렸다.

타임지는 두테르테 대통령을 미 공화당 대선후보 트럼프와 비교하며 권위주의 성향의 대중 포퓰리스트인 점이 닮았다는 내용의 <The Philippines’ Maverick President Duterte Offers a Glimpse of What Trump Foreign Policy Might Be Like>라는 기사를 지난 27일 자로 내보냈다. 이 기사는 또 오래 지속된 동맹 관계를 재편성하려는 점이 가장 유사하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이런 미국 측 염려에 대한 두테르테의 반응은 냉담하다. 방위협력확대협정 마저 파기할 수 있다는 말로 미국을 갈수록 자극할 뿐이다.

그래도 중국보다는 미국, 국민의 정서는 그대로

두테르테 대통령의 미국에 대해 맹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국민의 미국 호감도는 여전히 높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필리핀 국민 76%가 미국을 "매우 신뢰"하고 있으며 반대로 중국을 "매우 신뢰"하는 비율은 22%로 낮다. 미국 식민지 아래서 받은 교육체계와 민주주의를 포함한 미국식 문화가 그만큼 뿌리 깊게 자리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전략이 무엇인지 국내에서도 혼란스러워한다는 지난 21일 자 BBC의 보도 역시 필리핀 국민의 정서가 묻어난다.

영어가 유창한 필리핀 사람들도 많다. 미국에는 필리핀 사람 약 4백만 명이 일한다. 그들이 본국에 보내는 돈은 필리핀 경제의 주요한 축이라는 뉴욕 타임스(NYT)의 기사 역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줄타기 외교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속을 태우면서 최대한 필리핀에 유리한 경제·군사적 실리를 챙기려는 의도를 담는다. 필리핀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중국과 러시아, 필리핀과 끈을 놓지 않으려는 미국, 일본의 경쟁이 아시아·태평양에서 외교 지형을 얼마나 바꿔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국제 외교의 불문율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의 외교를 위해서 말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필리핀의 조사기관 소셜웨더스테이션(SWS)은 지난달 24∼27일 18세 이상 필리핀 국민 1200명을 대상으로 대면 조사를 벌였다.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이 전 세계의 화두다. 마약 소탕전을 벌이며 숱한 범죄자를 죽인다. 그 과정에 죄 없는 민간인 희생자도 나온다. 국내외 인권단체들 지적에는 모르쇠로 고개를 돌린다. 그래도 국민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전통 우방 미국과 더는 군사 훈련하지 않겠다면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극한발언까지 퍼붓는다. 보란 듯이 중국과 밀월관계를 펼친다. 난사군도(스프래틀리 제도) 갈등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미국과 등을 돌릴수록 두테르테를 향한 러시아와 일본의 구애 손길도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 두테르테. 기존 국정운영 관행과 국제질서를 깨면서도 날로 주가를 높여 가는 두테르테 신드롬에 단비월드가 3회에 걸쳐 돋보기를 들이댄다. (편집자)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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