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Rain] Police Violence: American Epidemic, American Consent

경찰 총격에 의한 흑인 사망, 폭동, 그리고 언론의 충격 보도로 구성된 일련의 사이클은 언제까지 반복될까. 한 명은 오클라호마에서 다른 한 명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경찰의 흑인 사살이 또 일어났다. 항의와 폭동도 다시 이어졌다. 방송사는 시각적인 자극과 뒤따르는 높은 시청률을 이유로 흑인의 죽음, 고통과 고뇌를 주제로 마치 ‘포르노’ 같은 프로그램을 어김없이 틀어준다.

지난 26일 뉴욕 타임즈는 과잉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전보다 더 격렬해졌다는 논조의 기사를 실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여전히 시위자들이 개인적인 동기로 항의에 참여하는 것일 뿐이라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이런 괴리는 왜 생길까?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시위대의 내면에 쌓인 문화적 상처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치열한 움직임은 폭력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 경찰들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 Andy McMillan

기사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더 이상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미국인들은 경찰의 진압과 사망, 그리고 폭동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합법적으로 이뤄진다는 몽상에 갇힌 상태다. 미국의 사법제도와 문화 메커니즘, 그리고 미국 그 자체 모두 심문을 받는 중이다.

지금 미국인들은 장막이 벗겨지고 트라우마가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간다. 이 시대는 비디오 시대이기도 하다. 전에는 경찰과 미디어에 의해 검열되던 사실들과 이발소나 식탁에서 소곤거리던 정보들이 시각적 증거로 포장돼 빠르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 시대 말이다. 이 시대는 저항의 언어가 규정되고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표현과 저항의 방식은 시범적으로 제시되고 효과적으로 증명된다. 이 시대는 계몽과 분노, 두려움, 절망, 행동주의 그리고 경계의 시대다. 흑인을 위한 미국은 더는 돌아올 수 없는 한계점 너머에 머문다.

이런 이슈들에 대한 토론은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진행돼야 한다. 왜냐하면 쟁점들을 다루기 위해 필요한 행동들 또한 넓고 깊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두려움이 화두였다. 긴급전화에서, 구급대원의 말에서, 무기를 꺼내 발사할 때, 살기 위해 도망치는 흑인들의 소망,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흑인 부모들의 걱정에서 생기는 두려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개인적인 두려움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대해 논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러한 두려움들을 알려주는 거대하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다.

미디어와 문화도구들이 어떻게 불공평하게 흑인들을 표현하는지, 흑인들을 특별히 위험하고 위협적인 범죄자로 묘사하는 편향성을 말할 때다. 그런 불공평과 편향성으로 얼룩진 역사적 규범들이 현대 미국식 ‘게토’를 만들고, 그곳에 빈곤을 집중시켰다. 그렇게 집중된 빈곤과 황폐화된 도시 그리고 절망은 범죄를 양산하는 주요 온상이 된다. 그 지역에서는 가난은 떼고 싶어도 뗄 수 없고 기회는 드물다. 자원, 교육, 의료 보험 모두 이런 지역에선 제한적이다.

미국인들은 지속적으로 선택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문화와 역사적 조건 아래서 이뤄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낡은 집과 학교, 허물어지는 공공시설, 슈퍼마켓과 의료 시설이 드문 동네에 살고 싶다고 선택한 적이 없다. 그러한 동네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여러 조건 아래 놓였을 뿐이다. 백인과 부유한 흑인들이 지역에서 이탈하고 공동시설과 민간사업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다. 사회적 기반과 대중교통을 구축할 정부 정책들이 도시의 일부분에만 배정되는 것도 한 이유다.

그리고 그러한 지역 사회에 사는 사람들, 때로는 그 사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열악한 상황일 때 종종 좋지 않은 선택을 한다. 우리는 범죄와 같은 좋지 않은 선택들이 잘못됐다고, 범법자들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결과를 순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사는 열악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좋지 않은 선택들은 풍족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좋지 않은 선택과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겉으로 같아 보이는 범죄라도 유독 빈곤층에게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이 더 빈번하고 가혹하다. 그렇게 그들의 결점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미국 정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소수의 잘못된 선택을 인종 전체의 문제로 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재난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다. 이는 의심과 두려움을 양산한다. 그로 인해 우리가 보았듯 경찰들에 의한 숱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은 좋지 않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좋지 않은 상황에서 단 하나의 나쁜 선택은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이다.

이것이 그러한 사건들과 ‘게토’ 지역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인종차별의 영향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다. 그렇다고 경찰이 다른 미국인보다 더 심한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미국 경찰 조직과 사법 체계를 포함해 미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야말로 가난하고 소수인 사람들에게 불평등하게 영향을 미친다. 이번 죽음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수령 수백 년이 넘는 나무를 완전히 베어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독성이 있는 나뭇가지의 잎사귀 몇 장을 잡아 뜯는 처방으로는 인종차별을 치유할 수 없다. 문제의 근원을 향한 도끼질이 해법이다.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인 마이크 펜스는 ‘제도적인 인종차별과 편견’을 ‘분열의 수사’라 부르며 “이에 대한 논쟁을 그만둬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는 미국인이 해야 할 일과 정확히 배치된다.

경찰은 순전히 주정부의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주정부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경찰이 관할 구역에서 시민을 통제하고 견제하는 활동은 모든 시민의 암묵적 동의를 구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이것은 악한 경찰의 문제가 아니다. 악한 사회의 문제다.

[기사 원문 링크]

Police Violence: American Epidemic, American Consent


IS, 히잡, 국제유가, 그렉시트, 브렉시트, 스위스 국민소득, 인종갈등, 미국대선, 일대일로, 지카 바이러스, 사드, 북핵... 외신을 타고 매일 쏟아지는 뉴스 소재다. 이를 제대로 모르면 현대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 무역, 안보에서 생존을 보장받기 힘들다. 인류역사가 제국주의 시대로 변모한 이후, 자본과 권력은 국경을 넘어 세계로 뻗는다. 냉혹한 국제 정치, 경제 무대에서 자본(Capital)과 힘(Hegemony)의 논리를 제대로 꿰뚫어야 하는 이유다. 단비뉴스는 <단비월드>를 통해 국제사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표면적인 움직임과 그 이면의 실상을 파헤친다. 난마처럼 얽힌 우리 앞의 과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을 증진하는 열쇠를 얻기 위해서다. (편집자)

편집: 신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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