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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네트 만드는 제페토 할아버지
[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⑮ 인형극단 보물 김종구 대표
2016년 07월 18일 (월) 23:14:49 황상호 기자 homerunsery@gmail.com

어머니는 기름때가 꾸덕꾸덕 묻어 있는 아버지의 무거운 작업복을 손으로 눌러 빨았다. 아버지는 철도 정비창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다. 그의 손을 거치면 고장 난 열차도, 집 안 보일러도 새 숨이 붙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손끝이 신기했다. 그래서 소년도 아버지 곁에서 나무 깎는 문구용 칼로 모형 비행기며 군함 따위를 만들었다. 그 소년이 이제 육십 줄에 접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목각인형이 쥐어져 있다. 팔과 다리, 머리 등에 줄을 매달아 조종하는 인형인 마리오네트를 국내에서 매우 드물게 제작하는 작가이자 가족 인형극단 <보물>의 대표인 김종구(60)씨를 지난달 23일 충북 충주시 동량면 작업실에서 만났다.

부산 사나이 김종구 대표. 그는 빠르지 않은 속도의 굵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170센티미터(cm)를 조금 넘는 키에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남자.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지만 ‘집과 학교 사이에서는 놀만큼 놀았던’ 청소년기를 보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체육대학교를 다닌다고 속이고 단골주점 주인 딸에게 연애도 걸어보고, 고등학교 졸업장이 나오기도 전에 아버지의 금반지를 훔쳐 일제 오토바이를 사고는 폭주족 흉내를 냈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쉽게 돈을 벌며 방탕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45살에 혈혈단신으로 러시아로 건너가 마리오네트 제작법을 배웠고, 지금은 온 가족이 참여하는 인형극단을 통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 김종구 대표가 충주시 동량면 자신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입는 옷들은 대부분 벼룩시장에 선 아주 저렴한 옷들이라고 한다. ⓒ 유순상

인테리어로 쉽게 벌고 방탕하게 쓰던 시절   

“돈도 일도 어려운 점을 모르고 살았어요. 주머니에 현금도 많아 주색잡기에 빠져 살았어요.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죠.”

80년대 성장의 시대. 김 대표는 군에서 제대한 뒤 부산의 한 신발회사에서 잠시 디자인을 하다 동네 형의 가게를 빌려 실내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잠시 전문대학 산업디자인학과 야간 수업을 다닌 게 학벌의 전부인데, 당시 교수의 서투른 디자인 실력을 보고 더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가게를 가꾸고 운영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가게 벽을 뚫어 문을 낸 뒤 실내에 멋들어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손으로 만지고 꾸미는 일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20대 후반에는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다. 목수와 전기 기술자를 채용해 나이트클럽과 주점, 가라오케들을 돌아다니며 실내장식을 했다. 돈 버는 일이 쉬웠다. 인테리어 분야가 초창기라 표준 가격도 없었기 때문에 초과 견적을 붙여 계약을 따냈다. 뭉텅이 돈이 들어왔다.

몇 해쯤 지났을까. 하루는 아내 송옥연(58)씨가 그에게 참았던 말을 털어 놓았다.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일감이 일정하지 않은 인테리어 일이라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던 걸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막 기독교에 입문해 신의 존재를 탐구하고 있던 김 대표는 ‘나는 잘 살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돌아보았다. 그는 땀 흘리는 정직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서른 다섯에 인테리어 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인테리어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술집 사장들이나 조폭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나도 술을 마시고 술을 팔아줘야 업자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비열한 세계였죠. 나도 돈 떼일 때가 많았고요. 가족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건데 잘못된 길을 갔던 거예요.”

   
▲ 청년시절 일제 오토바이를 타고 눈밭에서 찍은 사진. 갈색 장화에 모자까지 꽤 멋을 부리고 다녔다. ⓒ 김종구

그 후엔 뱃일도 하고 공사장에 나가 막일도 했다. 시장 장돌뱅이에다 농장 머슴살이도 가리지 않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택시 운전을 하다 빗길에 차량이 미끄러져 반파되기도 하고, 군고구마 장사를 하다 가스가 폭발해 얼굴과 눈 각막이 타는 대형 사고도 있었다. 어느 지방 장터로 고구마를 팔러 가던 길이었는데 덜컹거리는 차량에 프로판 가스통이 열린 줄도 모르고 불을 붙였던 것이다. 

“펑하는 순간 몸이 붕 떠서 날아갔어요. 정신을 차렸는데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였어요. 다시 기절했죠.”

응급차에 실린 채 동네병원에서 종합병원으로, 다시 안과 전문병원으로 실려 갔다. 부부는 각각 신에게 매달렸다.  김 대표는 “이제 앞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내가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할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를 물었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도울 수만 있다면 건강한 내 눈 하나를 떼어주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선교 인형극 본 순간 “하나님 저 이것 하겠습니다!”

다행히 각막 이식 없이도 눈 치료가 무사히 잘 끝났다. 김 대표는 두 눈에 압박붕대를 감고 3개월 정도 살았다. 시력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주일학교에 갔다가 인형극을 처음 봤다. 한 극단이 선교활동으로 인형극 공연을 했는데, 아기자기한 인형의 움직임이 김 대표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저거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1990년, 그는 지인들과 손을 잡고 ‘보리떡과 물고기 인형극단’을 만들어 고아원과 양로원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했다. 

“낮에는 고구마랑 붕어빵을 팔고 밤에는 극단 생활을 했어요. 단원 4명과 함께 고아원, 양로원을 다니며 손인형극, 장대인형극을 했죠. 아내는 꽃을 팔면서 도와줬어요.”

손재주가 뛰어났던 김 대표는 몇 해 안 돼 인형 제작과 연출에 두각을 나타냈다. 여러 곳에서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1997년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인형극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이다 국제인형극제’를 구경갔다. 거기서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줄을 따라 춤을 추는 인형, 마리오네트를 본 것이었다. 움직임이며 표정까지 변하는 인형을 보고 그는 순간적으로 홀려버렸다.  

“미국 팀 작품이었는데 보는 순간 꼼짝할 수 없었죠. 손인형극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또다시 ‘하나님 저거 제가 꼭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죠. 사실 그동안 일반 인형으로는 작품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하지만 여러 관절로 복잡하게 구성된 목각인형은 복잡한 상황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죠.”

마리오네트는 실이나 끈을 인형의 다리, 손, 어깨 등 여러 군데에 달아 조종한다. 18세기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작곡가의 음악을 마리오네트 오페라로 공연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아 독일어 사용을 강요받았을 때도 마리오네트 공연만은 자국어로 할 만큼 지역민의 삶에 뿌리 내렸다. 

   
▲ 다양한 작업도구가 진열돼 있는 김 대표의 작업실. 그는 한 번 일을 시작하면 식사시간 외에는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목각에 매달린다고 한다. ⓒ 유순상

하지만 국내에서는 마리오네트를 배울 만한 기관도 전문가도 없었다. 김 대표는 경남 양산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2천 5백 평 규모의 산골짜기에서 계단식 논을 지어 자급자족 하며 독학으로 마리오네트 공부를 시작했다. 독일어나 영어로 된 원서를 구해 사진과 그림을 보며 무작정 따라했다. 1년 동안 책과 씨름했지만 수십 개가 넘는 관절로 된 마리오네트의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학 밖에 길이 없었다. 그는 3년 동안 아내를 설득했다. 드디어 지난 2000년, 마흔다섯 나이에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학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한계에 부닥쳐 있었는데 옛 극단 동료가 러시아에서 공부할 만한 대학이 있다고 알려주는 거예요. 어렵게 아내에게 승낙을 받았죠.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이 막노동해서 번 100만원을 가져와 유학 가는 데 보태라고 줬어요. 덥석 받았죠. 이게 가족이다. 네가 힘들게 번 돈을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죠.”

홀대하던 러시아 교수, 졸업 땐 ‘최고의 제자’로 인정 

당시 러시아는 경제위기를 겪던 상황이었다. 외국 유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청강생 신분으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었다. 한 학기 학비도 우리나라 돈으로 10만 원 정도. 당시 러시아 교수의 월급이 7만원 수준이었다. 김 대표는 가족과 지인들이 준 돈 3백만 원을 들고 러시아로 건너갔다. 2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에 쓴 돈이 대략 5백 만 원 정도라고 한다. 끼니도 대부분 시장에서 장을 봐 직접 해먹었다. 

러시아 노 교수는 현지 말을 한 마디도 못 하는 동양의 늙은 학생이 반갑지 않았던 것 같다.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자신들의 목각기술을 동양인이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의문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김 대표는 모든 것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찬물 샤워로 아침잠을 깬 뒤 제일 먼저 작업실에 들어갔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작업을 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도시락 두 개를 싸서 다녔다. 그런 생활이 한 달 두 달 계속 이어지자 러시아 교수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김 대표를 따로 불러 개인 교습도 해줬다. 

“배워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어요. 한 두 시간도 헛되이 보낼 수 없었죠. 제가 미대를 나온 건 아니었지만 손재주가 뛰어나니 교수도 가르치는 데 재미가 있었나 봐요. 학교를 졸업할 때 그 늙은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나를 불러 세우더니 ‘수많은 학생을 가르쳤지만 당신이 최고의 제자다’라고 했죠. 뿌듯했어요.”

   
▲ 김종구 대표가 국악 공연을 만들기 위해 만든 작품. 줄을 잡아당기면 탈이 벗겨진다. 연필과 수채색연필로 그렸다. ⓒ 유순상

2002년 러시아에서 귀국한 뒤 다시 일 년 동안 경남 양산에서 칩거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어나 종이에 스케치했다. 그 스케치를 점토 모형으로 만들어본 뒤 수정을 거쳐 잘 말린 은행나무를 깎아 목각 인형으로 만들었다. 관절은 가죽과 나사를 이용해 만들었다. 인형 하나를 만드는 데 보통 3개월이 걸린다. 요즘 러시아 작가들도 손이 많이 가 거푸집이나 종이로 2, 3일 만에 인형을 만들지만 김 대표는 나무를 고집한다.

“정성이죠. 러시아에서 공부할 때도 우리 반에서 저만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었어요.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처럼요. 나무의 따듯한 질감이 좋아요.” 

유학가기 전인 1998년, 김 대표는 비닐하우스에서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다 손가락 한 마디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잘린 손가락 덕분에 나무 자르기가 더 편하다고 말한다.

“손가락을 다쳤을 때 교회 사모님이 와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저는 당당히 말했어요. 손가락이 다 잘려도 손목으로 나무를 받쳐서 인형을 깎을 거라고요.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요, 장애물이 와도 그것이 더 멀리 뛰어넘을 수 있는 디딤돌이라고 생각해요.”

   
▲ 김종구 대표가 만든 피노키오 얼굴. 작업 중 왼손 엄지손가락이 잘렸지만 작업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 유순상

전국 방방곡곡, 세계 곳곳에서 인형극 공연 

유학에서 돌아와 무대에 올린 그의 첫 작품은 <목각인형 콘서트>다. 목각인형들이 사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우아한 춤을 추는 발레리나와 말을 타고 대금을 부는 선녀,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는 중국 전통극인 변검과 색소폰을 부는 연주가 등 15개의 캐릭터가 번갈아 나와 장기를 펼친다. 김 대표와 아내가 인형을 조종하고, 가끔은 조카도 참여한다. 인형 중 발레리나는 부인 송옥연 씨를, 색소폰 연주자는 김 대표 자신의 청년 시절 모습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2004년 8월 춘천국제인형극제에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됐고, 2007년에는 전국문예회관연합회의 우수공연으로 뽑혔다.

“춘천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강원도로 심사를 받으러 가는데 급성 맹장염이 온 거예요. 얼마나 어렵게 얻은 기회예요? 포기할 수 없었죠. 심사위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심사를 받은 뒤 근처 병원으로 갔죠. 그 작품이 저의 대표작이 됐죠.”

두 번째 작품은 <노란우산>이다. 7분짜리 공연으로, 한 소녀가 노란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면서 이웃들과 겪는 여러 이야기로 짜여있다. 류재수 작가의 동화 <노란우산>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무대가 특별하다. 김 대표가 직접 설계도를 그려 만든 휴대용 무대를 펼치면 한 가족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무대가 된다. 두 세 평 크기의 공간에서 가족들이 어깨를 마주대고 공연을 본다. 어린 아이들을 위한 공연이다.

“아기가 울면 극장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엄마가 못 들어가든지 아빠가 못 들어가든지 모두 안 들어오든지 그래요. 그래서 한 가족이 다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무대를 만들었죠. 마리오네트도 손바닥보다도 작아요. 가족끼리 좁은 공간에서 공연을 보죠. 여름에는 에어컨까지 설치했어요.”

세 번째 공연은 작가 자신을 모티브로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의 꿈>이다. 아이가 없어 외로운 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을 그렸다. 극본은 며느리 이슬기(31)씨가 썼다. 작품들 대부분 공연 때마다 극단이 소화를 못 시킬 정도로 많은 관객이 찾는다. 극단은 또 인도 오지 등에서 극빈층을 상대로 자선 공연을 했고 대만, 캐나다, 스웨덴 등 전 세계를 다니며 솜씨를 뽐냈다.

“공연을 보기 전에 사람들이 물어봐요. 줄을 잡고 조종하는 제 모습이 무대에 나오면 (관객들의) 시선이 분산돼 집중이 안 되는 것 아니냐고요. 그런데 공연을 보고 나온 관객들은 하나 같이 저를 못 봤다고 말합니다. (인형의 움직임에)집중하느라. 근사한 음악과 함께 제 인형들의 입술, 수염, 얼굴 등이 다양하게 바뀌니까요. 고개를 돌릴 틈이 없죠.”

   
▲ 한 학교 학생들이 김 대표의 집을 직접 찾아왔다. 김 대표가 자신의 청년 시절이 투영된 캐릭터인 색소폰 부는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 멀리 철길과 함께 충주호가 보인다. ⓒ 김종구

“모두가 가는 길 벗어나도 행복할 수 있다, 얘들아” 

김 대표의 극단은 올해 든든한 멤버를 영입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외아들 김해일(33) 씨가 조명과 무대 기술을 맡기로 한 것이다. 이제 김 대표는 마리오네트 제작, 부인은 의상, 며느리는 극작을 전담한다. 연기는 부부와 며느리가 함께 한다. 며느리는 인형극이 좋다며 2011년부터 김 대표의 마리오네트 공연을 따라다니다가 한 가족이 됐다. 김 대표가 직접 아들을 소개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현재의 작업실이 있는 충주집 잔디밭에서 결혼식을 했다. 세 살 배기 첫 손자에 이어 며느리 뱃속에는 둘째 손주까지 장차 단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극단 <보물>은 승합차에 인형과 무대를 싣고 전남 광주, 경남 통영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고 있다.

“걱정들을 하시는데요, 공연 수익금으로 생활하기가 풍족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생활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텃밭에서 자급자족하고 옷도 벼룩시장에서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거든요. 안 쓰면 됩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탈출하면 돼요.”

지난 2009년 아름다운 충주호 옆으로 이사 온 김 대표는 곧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땅 값이 더 싼 경남 밀양으로 2018년까지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평생 꿈인 마리오네트 전용극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건물 두 동에 사무실까지 있는 장소를 찾았다. 전체 7백 평 규모로 관객 150명까지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충주에서보다 공연 기회가 줄 것 같아 아쉽지만 작품 제작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즐겁다고 한다. 김 대표는 마리오네트를 손주들에게도 가르쳐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고전을 만들 계획이다. 

“공연 때마다 저는 아이들에게 꼭 말합니다.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가지 마라. 그 길에서 벗어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 할아버지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너무 행복하다. 너희들도 꼭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편집 : 황두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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