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⑫ 자계예술촌 박창호 예술감독

아담한 키에 머리가 약간 벗겨진 남자가 미닫이문을 젖히고 살그머니 소극장 밖으로 나온다. 무대에서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모스부호(Morse code)처럼 끊어졌다 이어진다. 남자는 잡초가 듬성듬성한 흙바닥을 빙빙 돌다 낡은 벤치에 앉더니 말간 하늘을 바라본다. 아내인 박연숙(41) 자계예술촌 대표가 성폭력 피해여성을 소재로 한 1인극을 공연하는 동안, 밖에 나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박창호(53) 예술감독의 모습이다.

지난해 10월 17일과 31일 두 차례 찾아간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마을의 자계예술촌은 눈 감고도 계절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슬 젖은 낙엽 냄새와 나무 타는 훈향, 잘 말린 들깨 냄새가 바람결을 타고 콧속을 건드렸다. 신선 자(紫)에 시내 계(溪), ‘신선이 머무는 맑은 시내’란 이름을 가진 자계마을엔 30여 가구가 산다. 용화면사무소에서 차를 타고 10분은 더 들어가야 나오는 산골이다.

▲ 충북 영동군 자계예술촌 예술감독 박창호(53)씨. ⓒ 유순상

하수구 냄새나는 지하 무대 벗어나 산골 폐교로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박 감독은 1982년 충남대 지질학과에 들어간 이후 줄곧 대전에서 활동했다. 대학 시절 ‘얼카뎅이’라는 이름의 학생운동 문화선전대에서 시위 현장의 마당극 등을 이끌었다. 요즘도 후배들에게 전통가면극인 고성오광대 춤을 가르칠 정도로 몸짓에 일가견이 있다. 90년대 들어 놀이패 내부의 운동 노선이 갈리면서 뜻이 맞는 이들과 대전에서 극단 ‘터’를 만들었다.

돈 없는 극단에겐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비만 오면 물이 계단을 타고 내려와 지하 연습실이 수족관 신세가 됐다. 배우들이 슬리퍼를 신고 바가지로 퍼냈지만 마르기가 무섭게 또 빗물이 덮쳤다. 그렇게 장마철을 보내고 나면 건물 식당의 하수구 악취가 코를 찔렀다. 두더지 같은 지하 생활이었다. 쉬는 시간에 배우들은 햇볕이 들어오는 작은 창가에 멍하니 서 있곤 했다. 한 공연이 끝나면 수십만 원 정도 수입이 생기지만 제작비로 다 들어가고 배우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지하에서 연습하다 보면 칙칙한 분위기가 작품에 반영되는 거예요. 배우들은 늘 움츠려 있고 연기도 축축 늘어졌죠. 소리도 문제였어요. 탈춤 추려고 악기를 두드리다 보면 소음이 나거든요. 주민들이 (시청에) 민원을 넣어 연습이 중단됐죠."

연극은 좋았지만 극단을 향하는 발걸음이 늘 천근만근이었다. 원 없이 햇빛을 보며 공연을 준비할 수 없을까. 그런 곳이 있다면 산이든 바다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폐교가 눈에 들어왔다. 농촌 인구가 줄면서 전국 농어촌에 문 닫는 학교가 늘자 지방자치단체들이 폐교 임대 경매를 인터넷에 올렸다. 대전과 가까운 곳에서 가장 싸게 빌릴 수 있는 곳을 골랐다. 그게 1992년 문을 닫은 용화초등학교 자계분교였다. 전체 2000여 평 규모에 교실 다섯 칸이 있는 본관, 교사들이 숙소로 쓰던 별관 한 동이 있는데 일 년 임대료가 500만 원이었다. 마을과 400미터(m) 가량 떨어져 있어 소음도 문제 되지 않았다.

"무대가 대전에 있건 서울에 있건 더 나빠질 게 없는 상황이었어요. 어차피 연극 관객은 고정적이었거든요. 연극 특성상 작품만 좋다면 관객이 먼 거리라도 찾아올 거라 판단했어요. 우리는 유명 연출가나 배우의 이름값으로 움직이는 극단도 아니었거든요."

▲ 자계예술촌 전경. 오른쪽 지붕이 야외 무대로 관객 4백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본관에는 100석 규모의 소극장과 함께 사무실, 의상실이 있다. ⓒ 유순상

2001년 단원 7, 8명과 함께 자계마을로 이주했다. 그 중 부부 단원은 별관을 고쳐 신혼집을 만들었다. 단원 중 나중에 부부가 된 이들은 도시에서 전세금을 빼 온 돈으로 인근 마을에 방을 얻었다. 학교 구석구석에 쌓인 폐비닐 등 좀내 나는 농촌 폐기물을 모두 치우고 단장을 시작했다. 깨진 유리창 등 떼어낼 수 있는 것들은 다 떼어내면서 공사를 했다. 본관 건물의 교실 2개를 합쳐 100석 규모의 실내 소극장을 만들고, 나머지 교실에는 의상실과 사무실을 넣었다. 학교 입구 쪽 별관은 식당과 배우들의 숙소, 연습실로 꾸몄다. 첫 삽을 뜬 지 6개월만인 2002년 3월, 개관식을 열었다. 2년 뒤에는 당시 문화관광부의 ‘생활친화적 문화공간 조성사업’에 선정돼 1억8천만 원의 지원금으로 야외무대도 만들었다. 비가 와도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철골구조로 기둥과 지붕을 만들었다. 관람객을 4백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전에는) 집수리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돈이 없으니 직접 다 고쳤죠. 보일러도 놓고 창틀도 만들었어요. 뭐하나 온전한 게 없는 상황이었죠. 정부지원금도 다른 단체가 개별 작품에 쓸 때 우리는 무대 등 하드웨어를 바꾸는 데 투자했어요. 멀리 내다본 거죠."

스무 명으로 시작한 관객, 지금은 연간 1천여 명

단원들은 매달 공연을 하기로 했다. 후미진 산골로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질 높은 공연을 꾸준히 해서 입소문을 퍼뜨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공연은 눈이 오는 기간을 피해 3월부터 11월까지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었다. 이름하여 ‘그믐밤의 들놀음’. 그렇게 7년 동안 63차례 관객을 만났다.

처음 막을 열었을 때 관객은 인근 주민 스무 명 정도였다. 배우들의 마음 한구석에 어둠이 깔렸다. 그래도 태풍이 오든 번개가 치든 약속된 공연을 강행했다. 그게 자신들이 제일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가까운 동네에서만 오던 관객이 점점 이웃 마을로, 또 인근 전북 무주군과 충북 청주시로 범위를 넓혀갔다. 지금은 한 번 공연에 100명 정도가 객석을 채운다. 지역 문화공연에 목말라 있던 농민, 자영업자들과 대학교수 등 30~40대 이상의 다양한 관객이 먼 길을 마다치않고 온다.

"2002년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강타했죠. 우리 건물에도 비가 들이치고 근처 도로는 빗물에 잠겼죠. 그래도 저희는 공연을 했어요. 하늘이 두 쪽 나도 했죠."

▲ 매년 여름 야외무대에서 진행되는 산골공연예술잔치. 초청 공연팀이 관객을 무대로 불러와 공연하고 있다. 배우들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 유순상

찾아오는 발길이 늘자 신명 난 단원들은 판을 더 키우기로 했다. 매달 하는 공연을 모아 더 큰 잔칫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획된 것이 ‘다시 촌스러움으로, 산골공연예술잔치’다. 2004년 여름 처음 막을 열어 지난해 12회를 치렀다. 사흘의 잔치 기간 동안 각지에서 7백여 명이 찾아왔다. 지난해는 특히 음악과 설치미술을 결합한 퍼포먼스 그룹 음악당 달다(대표 연리목, 이정훈)의 ‘랄랄라쇼’, 심청전을 각색한 마당패 우금치(대표 류기형)의 ‘청아청아 내 딸 청아’ 등 8편을 선보였다. 박창호 감독과 박연숙 대표가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한 극단 터의 ‘방을 위한 투쟁’이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남녀가 인간의 해방구이자 안식처를 상징하는 방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예술잔치 부제가 ‘다시 촌스러움’이에요. 촌스럽다는 말을 대개 부정적으로 쓰잖아요. 하지만 촌스럽다는 것은 농부가 나락 농사를 고집하듯 기본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요. 기본적인 것을 충실히 하고 그다음 대가를 바라는 거죠. 연극인에게 촌스럽다는 것은 가장 연극다운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태도와 자세죠."

집중도 높은 관객에 초청 배우들이 위로받고 돌아가

여름에 산골공연예술잔치가 있다면 가을에는 ‘산골마실극장’이 있다. ‘잔치’가 전 연령층이 푸지게 놀 수 있는 마당극 성격이라면, 산골마실극장은 인간의 불안과 혼돈을 다루는 부조리극이 중심이다. 내용이 좀 어렵더라도 관객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자는 취지로 시작, 지난해 3회를 마쳤다. 서울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극단 초인(대표 박정의)이 무명배우의 욕망을 다룬 ‘어느 배우의 슬픈 멜로드라마 맥베드’를 선보였고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굿과 제례의식 속 몸짓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 ‘빈손’을 열연했다. 마지막 날은 박연숙 씨가 1인극 ‘해자와 혜자’를 연기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인 해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편견과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 세 편 모두 1인극 아니면 2인극이었다. 먼 산골에서 공연할 팀을 섭외하고 비용을 줄이다 보니 규모가 작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메시지는 더 농밀해졌다”고 박 감독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내가 연출한 연극을 보고 즐거워한다면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표가 덜 팔리더라도 심도 있는 공연들이 무대에 계속 올라와야 하거든요. 가령 글쟁이들은 글로 사회 부조리를 이야기하지만, 저희 연극인들은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 등을 통해 말하거든요. 산골에서 열리는 셰익스피어 공연, 멋지지 않나요."

▲ 자계예술촌 박연숙(41) 대표의 1인극 <해자와 혜자>. 성폭력 피해 여성의 고통을 연기하고 있다. 종이 위에 연필 드로잉을 한 뒤 부분적으로 색연필을 칠했다. ⓒ 유순상

연극의 3요소는 희곡과 배우, 관객이다. 자계예술촌의 관객은 공연의 수준을 높이는 한 축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어느 예술가는 초청 공연을 끝내고 자신의 블로그에 예술촌 관객을 ‘창의적 관객’, ‘자신만의 심미적 기준을 갖춘 교양인’이라고 치켜세웠다. 관객들이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를 따라 자신들의 온 감정을 소환해 교감하기 때문이다. 영화관이나 술집 등 유혹할 것이 없는 산골에 오로지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니 집중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오히려 감동을 받고 간다고 말해요. 배우의 감정 선을 따라 관객들도 같이 울고 웃어주기 때문이죠. 이곳은 관객들이 지나가다 시간을 때우러 오는 곳이 아니라 최소 일주일 전부터 일부러 시간을 빼두고 방문하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죠."

관람료는 후불제 자유요금이다. 관객들이 느낀 감동만큼 무대 앞 항아리에 넣고 간다. 처음에는 10명 중 한두 명만 돈을 냈지만 갈수록 그 수가 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음료수와 쌀을, 어떤 이들은 자신이 농사지은 벌꿀을 놓고 가기도 한다. 예술촌을 운영하는 데 부족한 재원은 박 감독 부부가 다른 지역에 초청 공연을 가거나 아이들에게 연극 수업을 해서 번 돈으로 메운다.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것들이 있어요. 연극을 보며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들, 가치들이 있거든요. 우리가 즐겁게 베풀 수 있는 것이 공연이고, 농민에겐 그것이 농산물인 거죠."

▲ 마을 주민이 만든 국수. 관객들이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많은 양을 준비하고 있다. ⓒ 유순상

공연이 끝나면 소담한 국수 그릇이 별관 식당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떡볶이도 있다. 박 감독이 손맛 좋은 마을 주민에게 부탁해 마련한 간식이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 대한 답례라고 한다. 연극을 본 아버지와 딸, 부부, 오래된 연인들이 국수 가락을 넘기며 감상평을 나눈다. 마음속 별점이 몇 개나 매겨졌는지 박 감독도 근처에 앉아 긴장하며 엿듣는다고 한다. 인터뷰를 위해 두 번째 방문한 날, 박 감독은 대접 가득한 국수를 두 그릇이나 먹었는데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비평을 좀 더 듣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잔치란 게 일방적으로 돈 내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옛날에는 마을 잔치를 할 때 마을 사람들이 돈도 모으고 노동력도 나눠가며 만들었잖아요. 저희 공연도 그런 잔치판과 같은 거죠."

88세 노인을 무대에 세운 주민 연극제도

외지인이 폐교를 빌려 문화 사업을 하다 원주민에게 쫓겨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마을 정서를 무시하고 사업을 확장하다 눈총을 받는가 하면, 사업성이 있어 보여 주민들이 오히려 폐교를 임대하는 경우도 있다. 귀촌한 사람에게는 원주민과 잘 어울려 뿌리를 내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박 감독은 해법을 연극에서 찾았다. 지난 2005년, 인근 영동군 양산면 수두리의 마을 이장이 박 감독에게 마당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체험마을을 조성하고 있었는데, 다른 마을보다 더 돋보일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수두리 마을 연극제’가 탄생했다. 박 감독은 마을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소소한 이야기를 대본에 옮겼다. 밭에서 도망간 소를 찾느라 고생고생했는데 소가 멀쩡히 집에 와 있어 화가 나 소뿔을 부러뜨린 일, 아침에 수레에 쌀을 싣고 방앗간에 갔다가 그 돈으로 전부 술을 먹은 남편의 이야기, 육성회비를 못 줘 아이들과 다툰 이야기 등이다. 이장이 마을 주민들을 배우로 섭외하고 박 감독은 연출을 했다. 그 해 50여 가구 주민들 앞에서 공연했다. 배꼽을 잡는 사람, 민망해하는 사람 등 관객들의 반응도 볼 만했다.

"당시 나이가 최고 많은 배우가 88살 어르신이었어요. 농사지을 힘도 없으신 분이었죠. (주민 고령화로) 마을에는 60대도 거의 없었거든요. 처음에는 자기 이야기를 안 해 대본을 쓰는 데 애를 먹었죠. 친해지는 시간이 꽤 걸렸어요. 그래도 공연이 잘 끝나고 호응도 좋았죠. 요즘에 마을 주민들이 다시 연극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자계예술촌은 인근 주민들에게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공연이 입소문을 타면서 여러 방송사가 귀농과 귀촌, 산골 등 다양한 주제와 엮어 예술촌을 조명했기 때문이다.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농산물 현장 거래와 택배 판매도 늘었다. 매년 산골공연예술잔치가 열리면 자계리 부녀회가 먹거리 장터를 펼치고 잔치국수와 파전 등 식사거리를 만들어 판다. 마을 농민들이 생산한 블루베리와 곶감, 표고버섯 등 각종 특산물 장도 선다.

"우리가 알려지면서 방송에서 촬영을 많이 와요. 그런데 촬영팀들이 우리만 찍고 가나요. 동네도 촬영하고 특산물도 찍잖아요. 마을 분들은 그것 때문에 농산물 판매가 는다고 생각해 주세요. 예쁘게 봐주시는 거죠. 시골에서 의지로만 십몇 년을 어떻게 버텨요. 동네 분들이 도와주시니까 이제껏 있는 거죠."

버티는 일 쉽지 않지만 ‘삶의 주인’ 될 수 있었던 세월

산골 생활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우선 열 명 가까이 됐던 예술촌의 상근자가 이제 박 감독과 박 대표 둘만 남았다. 후배들은 대부분 대전으로 돌아가 공연이 있을 때만 온다. 24시간 편의점이나 옷가게 등 도시가 주는 편리함이 없고 다른 극단과의 교류도 쉽지 않은 공간에서 젊은 후배들이 정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배우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간제 일을 해야 하는데 일자리가 없었다.

‘버티는 것이 장기’라고 말하는 박 감독도 처음에는 이런 고립이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큰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거리의 신호등과 도시의 시곗바늘이 아닌,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대로 삶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술 마실 가게는 찾기 어렵지만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이 더 소중해졌고, 사람을 만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자신을 알아가는 맛은 웅숭깊어졌다고 할까요."

부부는 처음에 농사를 짓겠다고 밭 1000평에 각종 농산물을 심기도 했다. 농기계를 처음 몰다 손이 찢어진 일도 있다. 이제는 텃밭만 일구고 있지만, 산골 생활에 적응하려다 힘들고 불편한 일을 많이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밖에 나가 있으면 빨리 오고 싶다고 한다. 사람들 번잡한 것이 점점 불편해졌다. 누가 몇 시에 일어나라고 하지도 않고 몇 시에 자라고 간섭하는 일도 없는 자유를 즐긴다.

그래도 부부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간다. 월, 화, 수요일은 지역 초등학교에서 ‘침묵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학교폭력예방 연극교육을 하거나 지역아동센터에서 동화를 활용한 연극 수업을 한다. 목, 금, 토요일은 자체 공연 연습을 하거나 전국을 돌며 기획, 초청 공연을 한다. 지난해에는 충북문화재단의 ‘찾아가는 문화 활동 지원 사업’에 선정돼 1년 동안 아이들과 학교생활의 어려운 점을 극으로 만들어 공연했고, 8월에는 제주도 4·3평화인권마당극제에 초청돼 연극 ‘방을 위한 투쟁’을 선보였다. 꾸준한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한 ‘예술경영 콘퍼런스’에서 예술경영 우수사례 부문 최우수 단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름이 알려지니까 주위에서 아이들 체험 공간을 만들라는 등 여러 가지 제안을 해요. 사람들이 오면 잘 자리가 없냐면서요. 하지만 그것들은 작품 창작에 곁가지라고 생각해요. 저는 잘하든 못하든 연출할 때 ‘살아있구나’를 느끼니까요."

산골무대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연극인으로서 혹시 대도시 무대에서 각광을 받거나, 영화나 방송을 통해 인기를 얻는 배우를 키워내고 싶은 욕망도 남아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박 감독은 단호하게 답했다.

"연극인의 꿈이 다 영화배우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무대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이곳을 가꾸며 연극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을 키우고 싶어요. 전 늘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돼 있습니다."

▲ 자계예술촌 박연숙 대표와 박창호 예술감독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작품은 극단 터 대표작인 <방을 위한 투쟁>이다. ⓒ 유순상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편집 : 이명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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