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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아티스트, 연탄재로 꽃 피우다
[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⑬ 청주 수암골 림민 작가
2016년 02월 25일 (목) 21:43:02 황상호 기자 homerunsery@gmail.com

충북 청주시 수동 수암골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마을이다. 지금은 70, 80대 노인들이 주로 사는데, 다 합쳐야 60여 가구 남짓이다. 지난 2007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리면서 관광객이 찾아오고, 인기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등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그 덕에 마을에 고층 커피숍도 들어섰지만, 여전히 독거노인이 숨진 뒤 수십 일 지나 발견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관광객 중에는 함께 온 아이들에게 “공부 안 하면 이런 데서 사는 거야”라고 훈계하는 이도 있다. 소외, 삭막, 가난이란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 마을에 지난 3일 저녁 무렵 막걸리를 들고 찾아갔다. 

'담배 한 대' 부탁하는 가난한 예술가 

두 팔을 벌리면 양쪽 손에 담벼락들이 닿을 정도로 좁다란 언덕길을 5분쯤 걸어 오르니 합판으로 거칠게 짜 올린 작업실이 나온다. 웃는 표정이 익살스럽게 그려진 연탄재가 쓰레기봉투 옆, 손바닥만 한 텃밭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벽에는 유리병 하나가 줄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푯말에 물감으로 쓰인 글귀가 보인다. ‘가난한 예술가에게 담배를.’ 주인장 림민(38) 작가가 담배 한 개비 나눠 피우자고 지나가는 이에게 부탁하는 말이다.

“하루 일과요? 뭐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죠.”

   
▲ 림민 작가가 작업실 안 컴퓨터 자리에 앉아 있다. ⓒ 유순상

180센티미터(cm)가 넘는 큰 키에 마른 체격인 림 작가는 작업실이자 자취방인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방이라고 해봐야 서너 평 크기에 이불 대여섯 장이 전부고, 나머지 공간은 연탄재를 말리는 이른바 ‘연탁 덕장’과 작업실이었다. 인권운동을 하는 지인이 무료로 빌려준 집이라고 한다. 원래 지인의 어머니가 마당으로 사용하던 야외 공간인데, 림 작가가 건축자재를 사와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작업실 안에는 한 진보 정치인의 초상화와 철 지난 가수의 노래 테이프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자가 공간을 둘러보는 사이 작가는 작업실 안 싱크대에 서서 쌓아둔 컵과 접시 등을 씻었다. 보일러가 없어 연탄난로 위 누런 들통에 물을 데워 쓰고 있었다. 

   
▲ 연탄을 말리는 이른바 '연탄덕장'이다. 연탁 수십여 개가 쌓여있다. 연필로 그렸다. ⓒ 유순상

지난겨울 림 작가는 지역 예술가로서 뜻밖의 주목을 받았다. 지상파 방송과 주요 신문들이 그의 작품을 조명했다. 타고 남은 연탄재 1,100개를 이용해 3미터(m)짜리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동네 주민들이 차 마시고 수다 떠는 평상 옆 작은 공터에다 설치한 것이다. 연탄재에는 큼지막한 눈과 활짝 웃는 입모양을 제각각 그려 넣었다. 다 타고 버려지는 천덕꾸러기 연탄재가 미술작품으로 생명을 얻었다. 이 작품을 만들려고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지역 주간지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크라우드펀딩(대중모금)으로 재료비를 모았다. 모두 180명이 7백여만 원을 보태 주었다. 벽화를 보러 마을을 찾던 관광객이 하루 평균 300명 정도였는데, 연탄트리 유명세 덕에 500명가량으로 늘었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작업실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왔죠. 학생들도 배우고 싶다고 찾아와 한동안 정신이 없었어요. 밀려오는 전화에 핸드폰 번호까지 바꿨어요.”

   
▲ 청주시 수암골을 빛내고 있는 연탄트리다. 지난해 12월부터 최근 2월까지 전시했는데 오는 3월 철거할 계획이다. 연탄트리에는 오디오까지 만들어 놔 휴대전화나 음반기기를 연결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 충청리뷰

파인애플, 뻥튀기, 양말 팔며 글쟁이 꿈 키워  

림 작가는 충북 음성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중학생이 됐을 무렵 아버지는 좋지 않은 일로 집을 떠나있었고 어머니는 가출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찾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갔다가 그 길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 원짜리 달동네 방을 전전했다. 겨울이면 보일러에 기름 넣을 돈이 없어 그냥 냉골에서 지냈다.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재래시장에서 수세미와 인형, 칫솔을 떼다가 상가를 돌며 팔았다. 술집을 기웃거리며 파인애플 장사도 했다. 교통체증 구간에서 뻥튀기를 판 일도 있다. 그중 십 년 넘게 한 일은 양말 판매다. 서울에서 안 가본 노인정이며 아파트가 없을 정도로 발품을 팔았다. 할머니들에게 ‘학비를 벌기 위해 나온 대학생’이라고 속이고 양말을 판 적도 있다고 한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끝에서 끝을 돌며 양말을 팔았어요. 서울에서 안 가본 거리가 없을 정도예요. 늘 이 양말을 다 팔 수 있을까, 어떻게 팔아야 밥을 먹을 수 있을까가 숙제였어요. 오로지 나 혼자였으니까요.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였어요. 어떤 날은 5천원 어치가 안 팔려요. 지하철비 내면 밥값이 없었죠. 그러다 어느 비 오는 날 너무 배가 고파 수제비를 먹었는데 갑자기 서글퍼져 국그릇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림 작가는 한때 전태일 문학상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었다. 컴퓨터 폴더에는 빛을 보지 못한 습작 소설이 가득하다. 열흘 바짝 일해 1백만 원쯤 번 뒤 20일 동안 글을 쓰던 시절이 있다. 골방에 박혀 글을 쓰고 친구들과 어울려 서로 비평했다. 등단을 위해 여러 신문사에 투고했지만 실패했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 친구 10명과 ‘인디문학네트워크’라는 웹진을 만들었다. 

“음악에는 인디(독립)가 있잖아요. 문학에도 인디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가 편집장을 맡았다. 친구들에게 원고를 받아 웹진에 올리고 한 달에 한 번 인쇄본을 만들었다. 책은 지인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팔았다. 서울 홍대나 종로 프리마켓에 참가해 책을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흐지부지 그만 두었다. 요즘은 홈페이지(http://streetartist.kr)를 만들어 연탄 일기 등의 글을 쓰는 정도다. 

“배낭에 노트북 하나 책 몇 권을 가지고 다니며 달동네에서 방을 빌려 습작을 했어요. 월세가 밀리기 일쑤였죠. 참 쓸쓸한 시간이었어요.”

유튜브 통해 그림 독학하다 '연탄재 장난' 시작   

서른두 살이 되던 해 글쓰기를 접었다. 정적인 글쓰기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십 년 넘게 사귄 여자 친구와도 그 무렵 헤어졌다. 서울이 싫었다. 갖고 있던 전자제품을 팔아 모은 돈을 들고 무작정 강원도 강릉 정동진행 열차를 탔다. 거기서 부산까지 걸었다. 걷다 지치면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부산에 도착해서는 중고 자전거를 사서 다시 전국을 유랑했다. 1년 7개월 간의 방랑.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릿속이고 가슴속이고 터져 버릴듯했다.

   
▲ 서른두 살, 글쓰기를 접고 여행을 떠난 림민 작가다. 어느 도시의 서점을 방문했는데 책 읽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사장이 몰래 사진을 찍은 뒤 림민 작가에게 메일로 보내줬다고 한다. 펜으로 그렸다. ⓒ 유순상

“10대와 20대 때 서울이란 도시는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장소였어요. 나도 찬란히 빛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끊임없이 꿈을 갉아먹는 도시가 아닌가, 소비를 추동해서 낙오자로 전락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자전거 바퀴는 2011년 말 아버지가 살고 있던 청주에 다다랐다. 마침 텔레비전에는 청주시 수암골에 조성된 벽화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림 작가의 눈이 거기 꽂혔다. 그는 서울에서 그림 그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그래피티(벽 그림)를 즐기곤 했었다. 그 길로 지역 문화기획자의 허락을 받아 수암골 벽에 붓질을 시작했다. 처음 그린 것은 화장실 벽면을 채색한 천사의 날개였다. 그림을 배워본 것은 중학교 미술부 시절밖에 없었고, 유튜브(youtube.com)가 선생이 됐다. 

“제가 일반 화가처럼 화폭에 그림을 그린다고 누가 사겠어요. 길거리 아티스트를 해보는 게 어떨까 전략적으로 생각한 거죠. 그렇게 결심하고 2년 정도 전 세계 작가들의 유튜브 영상을 보며 파고들었어요.”

2012년 5월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던 어느 날, 림 작가는 이웃집 담벼락 아래 버려져 있는 연탄재 2장을 발견했다. 이웃집 할머니의 구들을 데우고 스러진 연탄재였다. 작가는 할머니에게 장난을 칠 요량으로 연탄재에다 눈과 입을 그리고 “간밤엔 따뜻하셨죠”라는 말풍선을 그려놓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 연탄재를 버리지 않고 보름 넘게 놔두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작정하고 아이템을 찾고 있었죠.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안 들 수 있는 분야로요. 그러다 장난삼아 연탄재에 그림을 그렸는데 할머니가 정말 즐거워하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놀랐죠. 소통이구나 싶었죠.”

   
▲ 수암골에는 아직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집들이 남아있다. 지붕에 연탄작품을 뒀다. 하늘은 구름이 꼈다. ⓒ 유순상

문학에서 연탄재는 누군가를 위해 뜨겁게 자신을 태운 뒤 마지막까지 눈길 위에 뿌려지는 희생 또는 연대로 은유된다. 현실에서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온기를 의존하는 생존의 보루이기도 하다. 림 작가는 연탄재를 보며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서진 연탄재도 버리지 않고 그 꼴 위에 그대로 그림을 그린다. 

“연탄재라는 게 이상한 매력이 있어요. 색깔도 다 다르고 모양도 달라요. 덜 타서 검은 띠가 남아 있는 것도 있고 바싹 타 타원형으로 부풀어 오른 것도 있죠. 쓸모없는 것도, 다 같은 것도 없죠.”

청주로 이주해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지역 작가들로부터 간혹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았다. 한 작가는 면전에 대고 “림민 씨, 지들이 다 작가인 줄 알아. 그치?”라며 깔보기도 했다. 연탄작품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무작정 찾아오는 사람들이나 제작비 지원도 없이 연탄트리를 더 설치해달라고 요구하는 공무원 등은 림 작가를 난감하게 한다.  

“종종 작품에 관심이 있다며 찾아와 별것 아니라는 듯 연탄재 굳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사람이 있어요.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또 어떤 공무원은 마을에 연탄트리를 더 설치해달라고 해요. 그런데 이게 순수 제작비만 5백만 원이 넘게 들어요. 통장 잔고 십 만 원이 넘지 않는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는 힘든 일이죠.”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시위현장으로 나온 예술가

지름 15.8cm, 높이 15.2cm의 연탄재. 그 위에 둥근 눈과 나선형의 입꼬리를 그리는 일이 간단해 보여도 여간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 먼저 연탄재를 특별한 방법으로 만든 경화제에 푹 담근 뒤 작업실 안 연탁 덕장에서 난로와 선풍기로 말린다. 그 뒤 코팅제를 덧바른다. 최소 2~3일은 걸린다. 여기다 아크릴 물감이나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린다. 눈과 입의 세밀한 모습을 표준화하는데 1년 가까이 걸렸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면서, 함께 배치했을 때 조화로운 모양새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림 작가는 지난해 ‘연탄 캐릭터’를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미술저작물로 등록했다. 

“사실 제가 하고 있는 이 작업들을 예술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함께 놀아주기를 바라며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의 작품을 보며 잠시라도 웃고 행복하면 충분한 거죠.”

   
▲ 폐가 주위에 건설자재와 쓰다 남은 시멘트가 널부러져 있다. 림민 작가는 무릎을 붙잡고 웅크리고 있는 긴 머리 소녀를 그렸다. 그 옆에는 '괜찮아 잘될거야'라고 적힌 연탄 작품 두 개를 놓았다. 누군가 돌탑도 쌓았다. ⓒ 유순상

그의 작품은 시위현장에서도 볼 수 있다. 재작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농성현장에 작품을 설치했다. 지인들과 응원만 하고 돌아오려다 연탄재 70장으로 만든 작품을 설치했다. 연탄구멍에는 나무 푯말로 ‘힘을 내라’는 글을 써 꽂아 넣었다. 지난해엔 청주시청 앞 천막농성장에서 병원 정상화와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청주시노인전문병원 노조를 위해 연탄 트리를 세웠다. 또 청주시 청소년 광장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옆에도 위안부피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마음으로 연탄 트리를 설치했다. 충북지역 환경단체들은 림민 작가의 이런 사회참여를 높이 평가해 지난해 12월 ‘충북환경대상 문예부문상’을 주기도 했다.

"제가 일하면서 돈 떼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똑같은 일을 했지만 돈을 반밖에 안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대기업 반도체 공장, 그리고 하루 16시간씩 일했던 택배 회사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사회문제에 민감하죠."

미국 타임스퀘어 광장에도 연탄트리 세우고파 

연탄 작품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림 작가의 생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새벽에 빈 담뱃갑을 들고 골목에 나와 꽁초를 줍다가 이제 담배를 사 피울 수 있을 정도로 변화했을 뿐이다. 간혹 지인과 관광객이 연탄 작품을 주문하면 용돈이 생긴다. 인터뷰 중에도 림 작가는 재떨이에 남은 꽁초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침에 찌든’ 담배꽁초라고 한다.

그는 종종 우울감이 불청객처럼 찾아온다고 털어놓았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힘내요, 할 수 있어요' 같은 문구가 이른바 값싼 힐링, 가벼운 위안이 아닐까 고민한다. 연탄 작품으로 지역에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는 동안 ‘뜨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비난을 들은 적도 있다. 괴로웠다. 석 달을 술독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 잡지 편집장을 하는 선배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냉소는 멋있어 보일 수 있지만 자기학대와 모멸 외에 남는 것이 없단다. 민아, 나는 네가 세상에 따듯한 입김을 불어 넣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작가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갈 힘을 얻었다.

“저의 냉소는 거리에 있어요. 양말이 안 팔려 서성이던 그 거리들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세상들요. 그런데 형의 편지를 읽고 펑펑 울었어요. 내가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세상을 향한 냉소였던 거죠. 많이 털어버렸어요. 삭막한 도시에 한 번만이라도 웃게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를 불러주는 곳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림 작가는 지난해 봄 ‘충북 엔지오(NGO) 페스티벌’에 초대받아 아이들과 연탄 아트체험을 진행했다. 연탄재 위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도록 한 다음, 작품 50여 개를 두꺼비 집단서식지인 청주시 두꺼비생태공원에 전시했다. 이어 여름에는 ‘2015 세계청년축제’에 초대돼 광주시 동구 금남로에서 연탄 전시회를 열었다. 또 세종과 대전, 충주, 상주 등 전국을 돌며 공중전화 부스나 화단 등 자투리 공간에 전시하고 있다. 올해 연말에는 전국 투어를 끝내고 청주에서 기념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 림민 작가가 야외 작업실에서 잘 말린 연탄재에다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충청리뷰

달동네 ‘흙수저’ 작가의 다음 목표는 월드 투어다.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며 연탄 작품 수백 장을 전시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가 이모티콘처럼 만화적인 데다 그 나라 언어로 메시지를 적으면 외국인에게도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처음 국내에서도 호응을 보인 건 예술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었거든요. 시민들이 움츠러든 저에게 ‘작가님, 이게 바로 예술이죠’라고 말하더라고요.” 

다만 비용이 문제다. 팟캐스트를 통한 모금과 크라우드펀딩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모을 구상을 하고 있다. 백두산을 넘으니 히말라야가 앞에 놓인 꼴이지만 꿈은 이뤄진다고 믿고 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광장에 연탄 3백 개가 쫙 깔린 것을 상상해 봐요. 헤벌쭉 웃는 연탄 캐릭터가 깔려 있으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그것도 구멍이 숭숭 뚫린 정체 모를 물건이요. 외국인에게도 충분히 먹힐 거예요.”

인터뷰를 마칠 때쯤 작업실 탁자 위에는 막걸리와 소주, 맥주병이 잔뜩 쌓였다. 중국집에서 배달 온 양장피는 절반이 남았는데 기자의 혀가 먼저 꼬였다. ‘장판 위를 뒹구는 잉여’ 시절을 거쳐 ‘연탄재 같은 연대를 실천하는 예술가’로 성장한 그를 보니 ‘변방은 창조의 공간’이라고 한 고(故) 신영복 선생의 말뜻을 알 것도 같았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편집 :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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