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영화 ‘깨어난 침묵’

우리나라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자면 많은 제약이 따른다. ‘파업과 ‘투쟁’한다는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을 견뎌야 하고, 노조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협약 내용도 따르지 않는 회사들도 걸림돌이 된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노조조직률은 10%를 겨우 넘는다.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는 무시되고 그들의 목소리는 세상에 전파되지 않는다. 여기, 또 하나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부산에 위치한 막걸리 제조회사 생탁 노동자들의 이야기인 <깨어난 침묵>이다.

지역 유지들로 이뤄진 41명의 사장단, 130명의 노동자

영화는 부산 지역 합동양조에서 2014년 10월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이야기한다. 새벽같이 출근해야 해서 매일 택시를 탈 수밖에 없는데 회사는 버스비만 돈을 지급하고, 연차수당은커녕 휴일마저도 챙겨주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쌀을 찌는 솥에 들어가 일해야 했지만 누구도 힘든 환경을 개선하려는 투자는 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는 노동자들이 일할 당시 공장 내부를 찍은 영상이 등장하는데, 벽과 바닥 군데군데 때가 끼어있고, 양조시설에 쌓인 먼지들이 클로즈업된다. 막걸리를 만드는 과정의 위생상태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한 노동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제조과정이 너무 더러워서 입사하고 3년 차까지는 내가 만든 술이지만 못 먹었습니다. 근데 더러운 걸 자꾸 보다보니 더러운 것도 그냥 일상처럼 느껴지더군요. 어느 순간 저도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

▲ 빗속에서도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생탁 노동자의 모습. ⓒ GFFIS

1970년 박정희 정권 당시 세원을 확보하기 위해 각 지역의 양조장을 통합했다. 당시에는 각자 집에서 술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지역에 많은 양조장들이 있었다. 이들이 통합되면서 모두 사장이 되고 결과적으로 부산 지역 합동양조에서만 41명의 사장이 생겼다. 그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며 지역유지인 41명의 사장단이 회사 수익의 3분의 1을 가져가고 있다. 그 사이에 130명의 노동자들은 일 년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가에 희망을 가지고, 야간 근로수당이나 휴일 근로수당은 구경하지도 못한 채 일하고 있었다.

“개들한테는 상여금 안 줍니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은 2014년에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해 4월부터 근로조건과 작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시작한다. 처음에 90%에 이르던 파업 찬성률은 사측의 회유로 45명 중 30명이 현장에 복귀하고, 15명만 남는다. 회사에 넘어간 이들이 어용 노동조합을 만들고 교섭권까지 가져가면서 파업은 무위에 그친다. 영화 중간 중간에는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그들이 직접 찍은 영상이 등장한다. 화면은 거칠고 깨끗한 음질은 아니지만, 그들이 사장단과 어용노조, 동원된 용역들로부터 받은 불이익과 부당한 대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협상 초기 장면에서 사측과의 협상을 앞둔 노동자들이 기대가 가득한 채 웃는다. 이들은 협상이 잘 되고 빨리 가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무 순진했다. 노동자의 기대와 달리 돌아온 건 회사 측의 매몰찬 태도였다. 사장 중 한 명은 “개들한테는 상여금 같은 거 안 준다”며 대놓고 노동자들을 무시한다. “우리가 개란 말이냐”며 항의하는 노조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업무집행 방해라며 이들을 끌어내는 어용노조원들에 의해 묻혀버린다.

결국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 중 한 명이 지난해 4월 부산시청 앞 광고전광판 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다. 조합과 노동자들은 서병수 부산시장이 나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고공농성에 참여했던 조합원은 원래 고소공포증이 없었는데 이번에 생겼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전광판 높이는 인간이 가장 공포감을 느낀다는 11.4m였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내려와 서병수 부산시장과 악수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이들은 시장의 정치적 쇼에 출연한 엑스트라였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시장과의 면담 후 곧바로 경찰서로 연행됐다. 서 시장은 사측과 타협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 노동자들은 서병수 부산시장의 해결을 요구하면서 3보 1배와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 GFFIS

노동자들이 흑백으로 등장하는 이유

영화는 시계 초침 소리가 째깍째깍 들리면서 한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눈가가 촉촉이 젖은 채 렌즈를 응시한다. 입은 열지 않지만 그의 말소리는 내면으로 들린다. 이렇게 한 사람씩 등장하면서 모두 5명의 얼굴이 이어진다. 표정은 각각 다르다. 무표정한 얼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 미간을 찌푸린 얼굴도 이어진다. 누군가의 얼굴을 이렇게 오래 본 적이 있는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너무 진지하고 많은 사연을 담은 표정의 얼굴들이 차례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영화 <깨어난 침묵>의 박배일 감독은 지난 8일 서울환경영화제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까지도 남아서 회사를 상대로 투쟁 중인 5명의 얼굴입니다. 지난 2년간의 투쟁 기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떠올려보라고 했을 때 나온 표정들이고요. 화면상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음성이 들리는 효과로 이들이 어떻게 침묵을 깨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박 감독은 처음에는 촬영 팀이 직접 촬영한 영상과 조합원들이 미리 찍은 화면을 구분하기 위해 촬영 팀이 찍은 영상은 색을 입히고, 조합원들이 찍은 분량은 흑백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흑백화면으로 상영된다. 그는 “노동자나 파업 또는 투쟁이라는 단어에 우리들의 편견이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며 색깔을 뺀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이 영화 필름에 색을 입히면 가장 많이 보이는 색은 빨간 색이거든요. 그런데 그 색깔을 보는 순간 사람들이 다른 말조차 듣지 않아요. 실제 영화에서 저 분들은 투쟁 자체에 대한 말보다는 파업기간 동안 인간으로 느꼈던 감정들을 더 많이 말하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색깔을 빼고 싶었습니다.”

▲ 생탁 막걸리를 제조하는 부산 합동양조 회사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의 모습. ⓒ GFFIS

흑백으로 된 배경은 옛날 영화 같은 느낌도 준다. 그는 색을 지우면서 시간도 지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박 감독은 “100년 전에도 노동자들은 투쟁했고, 아마 안타깝지만 100년 후에도 이런 일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노동자들을 침묵하게 하는 구조는 언제라도 발생한다는 생각이 안타깝지만 냉엄한 현실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흑백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잘못된 걸 바로 잡으려는 것 뿐

박 감독은 “감독이 노동자들과 만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전달하는데 집중한 영화”라며 “결국은 회사 내부구조의 불합리함을 알고 생탁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관객들에게 당부했다.

▲ 13회 서울환경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질문에 답하고 있는 박배일 감독(우). ⓒ 배지열

영화 속에서 조합원들은 부산 번화가에서 호소문을 나눠준다. 길거리에 나온 지 7개월째, 시민들의 지지만이 살 길이라는 그들의 읍소는 행인들에게는 그저 소음으로 느껴진다. 노동자들은 운행 중인 지하철 빈 좌석마다 유인물을 놓으며 생탁을 제대로 만들도록 불매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그 호소문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으로 클로즈업된다. 투쟁하는 조합원 중 한 사람은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회사도 좋은 회사되고, 우리 막걸리가 좋은 술이라는 것을 또 알리고 모두 웃으면서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다니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편집 : 이명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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