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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런 사랑은 원전처럼 위험했다
[씨네토크] 레베카 즐로토브스키 감독의 ‘그랜드 센트럴’
2016년 02월 27일 (토) 15:18:18 박장군 기자 pparreck@naver.com

"오직 날 사랑한다면 내 곁에 있어 줘요. 너무 진해지면 주의하세요. 잠자고 있을 땐 깨우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물리고 말 거예요. 낙엽 밑에 숨은 회색 뱀처럼...사랑은 죽음인가요. 죽음이기도 하지만 천국이지도 하지요."

달콤하지만 위험한 사랑의 역설. 영화 초반부에 흐르는 젤라딘(카밀라 를르슈 분)의 사랑 노래다. 사랑한다면 곁을 지켜달라고 하더니 너무 진해지지는 말라고 경고한다. 도대체 안전한 경계선은 어디란 말인가.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랑을 다룬 영화 <그랜드 센트럴> 포스터. ⓒ CAC 엔터테인먼트

키스와 피폭의 공통점

2010년 <디어 프루던스>를 연출한 프랑스 여성감독 레베카 즐로토브스키의 <그랜드 센트럴>은 치명적인 유혹으로 시작된 사랑이 점점 위험해지는 과정을 조명한다. 2014년 국내 개봉한 이 영화는 금지된 사랑의 포로가 된 남녀가 겪는 불안, 초조, 두려움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감독은 사랑의 위태로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라는 다소 낯선 소재를 끌어왔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원전이 사실은 죽음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비밀스런 공간이란 점을 십분 활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과 비밀스런 사랑이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층위에 나란히 놓인다. 감독은 사랑과 원전이 맞닿는 지점을 제대로 포착해냈다.

주인공 갸리(타하르 라힘 분)는 가난한 청년이다. 흰색 면내의에 체크남방과 검정 면바지만 주야장천 입고 다닌다. 별다른 기술 없이 맨몸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를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한 원자력발전소로 이끌었다. 원전에서 가장 위험하고 궂은일을 하는 계약직 노동자가 된 것이다.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들었어도, 갸리는 방사능의 위험을 햇빛에 살타는 정도쯤으로 여긴다. 위험이 피부에 와 닿기 전까지는 눈에 안 보이는 방사능 대신 돈이 더 중요했다.

그런 갸리에게 돈만큼 치명적인 유혹이 다가왔다. 아름답고 도발적인 여자 카롤(레아 세이두 분)이다. 직장 동료 토니(데니스 메노쳇 분)의 약혼녀이자 같은 원전 계약직 노동자인 카롤은 첫 만남부터 갸리에게 진한 키스로 도발한다. 갸리는 피폭된 것처럼 두렵고, 불안하고,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빙빙 돌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비밀스럽고 위험한 사랑의 늪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 방사능 고위험구역에서 질식해 정신을 잃어가는 토니를 구하는 갸리. ⓒ 영화 <그랜드 센트럴> 화면 갈무리

노골적인 밀회와 요란한 경고음

위태로운 사랑과 방사능의 위험은 평행선을 달린다. 노골적인 밀회가 반복되고 깊어지는 만큼 피폭의 순간도 빈번해지고 경고음도 짙어진다. 갸리를 비롯한 원전 노동자들은 방사능량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전자측정기를 가슴에 차고 일한다. 방사능 농도가 기준치를 넘는 위험구역에 들어서면 기기는 빠르게 울리며 경고음을 낸다. 일과를 마치면 전신의 피폭량을 검사한다. 기계 앞에 서서 3초간 기다린 후 녹색 등이 들어오면 통과다. 갸리는 밀폐구역에서 질식 위기에 처한 토니를 구하기 위해 보호용 장갑을 벗었다가 처음으로 피폭된다. “그렇게 빨리 퍼지는 거예요?”라고 묻는 그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갸리의 피폭량은 조금씩 위험 수준에 다다른다. 피폭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은 일을 마치고 목욕 타올로 자기 몸을 강박적으로 닦아내는 장면에서 극대화한다.

   
▲ 미친 듯 닦아내 봤자 몸에 스며든 방사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 영화 <그랜드 센트럴> 화면 갈무리

카롤은 갸리의 아이를 가진 후 토니가 느낄 배신감과 갸리와의 관계 사이에서 고민한다. 갸리를 좋아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랑이 어디로 흘러갈지 두렵기만 하다. 카롤은 갸리와의 결혼을 결심하지만 이내 토니를 사랑한다며 갸리 곁을 떠난다. 그즈음 동료들은 과다 피폭으로 하나둘 원전을 떠난다. 베테랑 노동자 질(올리비에 구르메 분)은 갸리가 쏟은 폐기물이 몸에 닿아 피폭된다. 습관처럼 떠나겠다고 말하던 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원전을 나간다. 전신이 피폭된 젤라딘은 이발기로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낸다. 격한 흐느낌은 사랑 노래를 속삭이던 모습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 젤라딘의 사랑 노래와 섬뜩한 이발기 소리가 뚜렷히 대비된다. ⓒ 영화 <그랜드 센트럴> 화면 갈무리

일곱 번의 사이렌이 의미하는 것은

감독은 평행선의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사이렌 소리를 들려준다. 사이렌은 영화 중반부에 갸리와 카롤이 사랑을 나눈 후 밀밭에 누워있는 장면에서 처음 울려 퍼진다. 카롤은 “사이렌이 네 번 울리면 원전에서 테스트한 것이고, 다섯 번은 주의보, 여섯 번은 경보, 일곱 번은 중대 경보를 내린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토니와 결혼한 카롤이 갸리를 다시 찾아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정확히 일곱 번의 사이렌이 울린다. 원전을 떠나는 갸리를 쫓아오는 카롤. 갸리에게 맞춰져 있던 카메라의 초점이 카롤의 애타는 표정에 맞춰지는 순간, 사이렌은 시작된다. “무서워서 그랬어”라며 갸리를 끌어안은 카롤과 알 수 없는 갸리의 표정 뒤로 영화는 암전되지만, 사이렌은 끝나지 않는다. 위태로운 사랑과 원전, 사이렌은 무엇을 향한 중대 경보일까.

   
▲ 엔딩 장면. 거친 사이렌 소리와 알 수 없는 갸리의 표정은 무엇을 암시할까. ⓒ 영화 <그랜드 센트럴> 화면 갈무리

<그랜드 센트럴>은 단순히 원전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여타 영화들과 결이 다른 작품이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랑은 무색, 무취로 다가와 때론 위험하고 느리지만 어느 순간 감염되고,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고 말한 즐로토브스키 감독은 사랑과 원전이라는 이질적 소재를 ‘불확실성’이라는 그릇 안에 절묘하게 녹여냈다.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색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는 원전(방사능)에 오염되고 있다고 에둘러 경고한다. 영화 초반, 방사능 교육 강사가 “프랑스에는 19개의 발전소와 58개의 원자로가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 남는 이유다. 프랑스는 전력생산의 75%가량을 원전에 의존하는 세계 두 번째 원전대국이다. 올랑드 대통령이 이 비중을 50%로 낮추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전기료 인상 등을 우려한 산업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영화는 비밀스런 사랑의 결말이 불안한 것처럼, 가장 안전한 에너지로 알려진 원자력발전의 위험이 사실은 매우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번 시작하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 때론 감당 못할 파국과 고통을 부른다는 점에서 금지된 사랑과 원전은 많이 닮았다.


편집 : 이명주 기자

[박장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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