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신형철 조선대 교수
주제 ① 문학에서 발견하는 삶의 의미

“‘삶의 의미’는 너무 거창하고 뻔한 말이어서 오히려 잘 생각하지 않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저한테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인 신형철 조선대 교수는 자신이 지나온 삶에 대한 소회를 풀어내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을 시작했다.

“서른이 되는 해에 등단이란 걸 하자마자 바쁘게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죠. 정신없이 살다 보니 마흔, 10년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허무했어요. 10년 동안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동안 쓴 책 두 권이라도 남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 신형철 교수는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 유수빈

‘자녀를 위해 산다’는 인생 선배들

그는 일만 하는 삶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일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에서 더 중요한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그 과정 이후 단계가 오지 않고 계속 여기에만 머물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인생 선배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답은 자녀가 삶의 의미라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이 답도 충분치 않았다. 자녀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일 터이다. '각자가 삶의 의미를 잘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관계가 바람직하지 않을까'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에게 소설과 시는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좋은 재료다. 그는 한국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읽을 때와 다른 성찰을 얻었다고 말했다.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는 단편소설 5편이 묶여있는 책이다. 대표 작품이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이다. ‘만복사저포기’에서는 오랫동안 연애를 못 한 주인공 양생이 부처님께 소원을 빌어 나타난 귀신과 며칠간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장례도 못 치르고 억울하게 죽은 여인이 떠나야 한다고 하자 양생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장례를 치러 한 없이 저승에 갈 수 있게 도와준다.

귀신과 사랑하는 이야기가 왜 이리 많은가

“귀신과 사랑하는 이야기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많이 있어요. 전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으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양생은 이후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생규장전’은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다가 전쟁으로 여성이 죽는다. 그 뒤 여성 최씨가 귀신으로 돌아와 못다 한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여기서도 삶과 죽음의 질서가 엄연해 최씨가 떠나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 이생은 그녀의 유물을 거두어 부모님 곁에 묻어주고 장례를 지낸다. 이후 최씨와의 추억을 생각하다 병을 얻어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난다.

"장례까지 치러줬으면 잠깐 동안의 사랑에 대한 예의를 다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주인공들은 모든 걸 버리고 사라지거나 병을 얻어 죽었어요. 김시습이 소설을 왜 이렇게 마무리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신 교수는 <금오신화>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읽을 때와는 다른 성찰을 얻었다고 말했다. © 유수빈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김시습이 살았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신 교수는 말했다. 김시습은 세종 때 태어났다. 3살 때 맷돌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지을 만큼 총명해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세종이 그 소문을 듣고 김시습을 불러 격려하기도 했다. 이후 세종, 문종, 단종으로 왕위가 이어진다. 하지만 1453년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단종 주변 사람들을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세조가 즉위한 뒤 문종 재위 시 단종 보위를 부탁받은 집현전 출신 신하들은 단종을 복권하려다 죽임을 당하는데 그들이 사육신이다.

당시 김시습은 열심히 공부한 뒤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가고 있었다. 하필 그때 계유정난이 일어난 것이다. 김시습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벼슬이 무슨 소용이냐’며 머리를 깎고 스님처럼 살았다. 워낙 뛰어난 인재였던 김시습은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던 인물들과 가깝게 어울리며 이른바 재야 지식인으로 지냈다. 거사에 직접 개입하진 않았지만 성삼문, 박팽년 등 친구들이 시체가 되어 길바닥에 버려진 상황과 마주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시체를 수습한 뒤 입산한다. 세조가 김시습을 불러 높은 관직을 주려 했지만 그는 세조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한다.

불우했지만 행복했을 김시습

“소설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니 뭉클해졌어요. ‘그녀가 귀신이건 아니건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가 떠난다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이후 나에게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 김시습에게 단종 또는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에 대한 충성이 이런 심정이었을 테죠. 결국 김시습은 죽을 때까지 관직에 진출하지 않습니다. 불우한 천재의 대명사인 거죠."

신 교수는 삶에 대한 김시습의 태도를 설명해주는 단어로 ‘fidelity’를 꼽았다. ‘fidelity’는 ‘충성’ ‘충심’ 등을 뜻하지만 남녀관계로 좁혀 생각하면 서로에 대한 정절의 의미가 있는 단어다. 오디오 기능 중 ‘하이파이 시스템’에서 ‘하이파이’의 ‘파이’가 ‘fidelity’를 줄인 말이다. 우리말로 소리가 매우 충실하다는 의미다.

신 교수는 김시습이 행복했을 거라고 말했다. 비록 현실에서 불우했더라도 ‘fidelity’를 바칠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니힐리즘에서 니힐은 ‘무(無)’를 뜻한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내게 의미를 주는 대상이 없다는 것과 같다고 신 교수는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이 허무한 반면 의미를 주는 대상이 있는 사람들은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곧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fidelity'와 함께 'commitment'를 설명하며, 무언가 헌신하고 몰두하고 바칠 대상이 있을 때 뛰어들어서 일을 시작하고 벌이는 것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commitment'라고 말했다. 그는 'commitment'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책에서 설명되는 '참여'를 뜻하는 등 다양하게 사용되며 책마다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며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를 덧붙였다.

"1979년에 등단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둘러싼 모험>을 보면 판타지적 요소는 있지만 리얼리즘은 없었어요. 그런 하루키가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 교주가 사람들을 세뇌해 지하철에 독가스를 뿌려 많은 사람이 죽은 '지하철 독가스 테러사건'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어요. 세계가 많은 사람으로 함께 이뤄진 것이고, 그 세계에는 선과 악이 있고, 고통받고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갑자기 확 실감한 거죠.

이후 하루키가 테러 희생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했고 책을 냈는데, 그게 르포집 '언더그라운드'예요. 이때 하루키가 현실개입을 말하면서 'commitment'라는 단어를 써요. 이전까지 소설이 현실로부터 떨어진 'detachment'였다면, 이제는 현실에 개입하는 'commitment'라는 거죠. 그 후 <1Q84>는 꽤 나름대로 현실의 문제에 개입하려고 한다고 볼 수 있어요."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은 문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 김근홍

우리나라 최초 소설이 금오신화인 이유

서양에서는 이미 근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점인 1400년대, 르네상스 시기에 소설이 탄생했다. 14~16세기의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 근대문학의 선구자들이 등장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최초의 근대소설로 보는 견해도 많다. 자의식이 많은 인물을 그렸기 때문이다. 서양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금오신화>, 광해군 때 쓰인 최초의 한글 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 숙종 때 김만중이 쓴 <구운몽>은 중세의 로망스에 지나지 않는다. 귀신과 사랑하고, 꿈속에서 선녀를 만나는 이야기는 근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소설로 나누는 기준이 학자마다 다 다르지만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합의한 권위 있는 의견이 있다며 고전문학자 조동일이 <한국소설의 이론>에서 말한 소설의 기준을 소개했다. 서양에서 중세의 로망스(romance)와 근대의 노블(novel)을 나누듯, 우리도 소설과 소설 이전에 있었던 설화로 나눌 수 있는데 이때 설화는 이야기의 구조에 따라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뉜다.

설화는 '자아'와 자아를 둘러싼 환경인 '세계'의 대결을 그리는데 그중에서 신화는 자아와 세계가 협력관계로 가면서 특정한 목적을 이룬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자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 그를 도와주는 주몽 신화와 오디세우스 신화가 그 예다. 이와 달리 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서 세계가 이기고 자아가 결국 실패해서 죽고 ‘그 자리에 나무가 자랐다’더라 등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민담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자아를 그린다. 영웅이 이겨서 공주를 구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소설과 설화는 어떻게 다를까? 소설에서는 자아와 세계가 팽팽하게 싸운다. 결국 마지막에 자아가 패배하지만 그럼에도 자아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여전히 옳다고 믿으며 세계가 틀렸다고 생각하며 끝난다. 그러므로 '지는데 사실은 이기는 것'이 소설이다. 신 교수는 "결국 주인공이 지는데 주인공이 그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소설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소설의 핵심을 금오신화에 적용해보면, 금오신화의 주인공들은 '삶과 죽음의 질서는 엄연하여 귀신과 인간은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세계관은 주인공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질서다. 그러나 주인공이 세계에 패배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으나 나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주인공의 태도는 질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끝까지 패배를 승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추구하는 가치는 귀한 거구나, 그 가치를 억압하는 세계가 옳은 세계인지 한번 반성해봐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인공의 가치를 응원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성찰하고 때로는 비판하는 게 소설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와 멜랑콜리, 소설의 두 요소

▲ 신형철 교수의 세 번째 책. 문학평론가인 신 교수가 사랑, 욕망, 윤리, 성장의 주제로 27편의 영화를 이야기한다. ⓒ 마음산책 제공

신 교수는 소설이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요소는 아이러니다. ‘져도 진 것이 아닌’ 태도를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그리스 희곡에는 두 인물의 유형으로 에이런(Eiron)과 알라존(Alazon)이 등장한다. 허풍으로 상대방을 속여 목적을 달성하는 알라존도 평범과 나약함을 가장한 에이런에게는 당해내지 못한다. 에이런은 알라존보다 약한 존재처럼 그려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에이런의 말과 행동양식에서 아이러니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신 교수는 소설의 결말이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멜랑콜리(melancholy)를 직역하면 ‘검은 담즙’입니다. 몸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즙이 있습니다. 그중 검은 것을 멜랑콜리라고 부릅니다. 원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검은 담즙이 많은 사람은 우울한 성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즐거운데 늘 혼자 우울하게 있는 사람이죠.”

소설의 두 번째 요소는 멜랑콜리다.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프로이트는 멜랑콜리를 정신의학적으로 접근했다. 사람들이 상실을 경험할 때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애도이고 다른 하나는 우울이다. 상실을 받아들인 뒤 애도를 마치고 현실로 복귀하는 것이 전자의 태도다. 잔인하게 말하면 ‘마음속으로 애도의 대상을 한 번 더 죽이고’ 현실에 복귀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이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애도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상실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온 에너지를 자신에게 쏟는 사람이다. 이것이 우울증의 양상이고 ‘멜랑콜릭’ 상태다. 우울에 빠진 사람은 떠난 사람과 나의 운명이 분리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정의에 의하면 우울은 병이다. 하지만 이것을 윤리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슬픔은 포기하는 것인데 우울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울을 병으로 볼 수 있지만 문학의 관점에서 우울은 슬픔보다 더 윤리적일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사람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금오신화가 왜 소설인지를 좀 더 확대해보면 소설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위대할 수 있는 것은 애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패배하더라도 소설 안에서만큼은 작가와 주인공이 힘을 합쳐서 ‘돈이 제일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은 더 중요한 다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우울증 환자처럼 남아있다. 이러한 태도는 무엇이 성공이고 패배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시를 읽어라, 질문을 던져라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질문을 잊어버리고 사는 동안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던지는 동안은 온전한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질문을 계속 던지려면 자극이 필요합니다. 그 자극 중 하나가 시입니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신 교수는 릴케의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소개했다. 토르소 앞에 선 릴케는 이것을 보며 압도당했다. 몸통밖에 없는데도 너무 아름다운 조각을 보며 이 아름다움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상상했다. 목이 잘렸으니 눈이 없는데도 몸에 눈이 박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거기에는 그의 사물을 보는 눈이 틀어박힌 채, 그대로 남아 빛나고 있다’는 구절이다.

▲ 아폴로의 토르소는 온몸으로 관객을 향해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 Wikipedia

“온몸이 맹수의 모피처럼 반짝이고 몸의 가장자리마다 별처럼 빛이 비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눈 때문이죠. 몸뚱어리를 보고 ‘저 몸은 온몸이 다 눈이다’는 생각하기가 쉬울까요? 정말 놀라운 생각입니다. 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아폴로의 토르소는 온몸으로 눈을 뜨고 관객을 향해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 교수는 이 구절을 대학교 때 읽으며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그 뒤 ‘아, 내가 안 바꾸고 오래 살았네’란 생각을 문득 하고 정신을 차리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끝났다.

“들리세요? 이 토르소가 하는 말이? 너의 삶을 바꾸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연주 조효제 정희진 김혜원 이문재 이택광 신형철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 :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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