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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영웅주의가 낳은 슬픈 역사
[인문교양특강] 정연주 전 KBS 사장
주제 ② 하워드 진의 미국사 읽기
2015년 12월 28일 (월) 01:25:22 이성훈 전광준 최지영 기자 ssal123@daum.net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기존 역사책에서 빠진 공백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역사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콜럼버스를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자'로 보는 역사에서 벗어나 소외된 ‘인디언’의 시각에서 보자고 했다.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북남미를 합해 약 4천만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정 전 사장은 “스페인, 포르투갈 등 식민지를 찾던 제국주의 국가에게는 ‘신발견’일지 모르지만, 원주민은 ‘침략당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하워드 진의 저서 <미국민중사>의 첫 장에 담긴 ‘콜럼버스의 항해일지’를 읽었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등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무기가 없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정 전 사장은 “원주민들은 어떠한 적대감도 없이 환대해줬건만 콜럼버스가 원한 건 금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콜럼버스가 첫 발을 디딘 뒤 수많은 원주민이 학살됐다. <미국민중사>에 따르면 1515년 바하마 군도에는 5만의 원주민이 있었으나 1550년에는 500명만 남았고, 1650년에는 원주민 전체가 전멸당했다.

   
▲ 콜럼버스는 1492년부터 150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대서양을 항해했고,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던 그는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 Flickr

‘위대한 탐험가’가 저지른 대량학살

정 전 사장은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라는 편향적 인식을 강화한 인물로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인 사무엘 엘리엇 모리슨을 소개했다. ‘콜럼버스 전문가’로 알려진 모리슨은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항로를 그대로 따라 항해하고 <콜럼버스 전기>를 썼다. 모리슨은 ‘콜럼버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항해와 개척이 인종학살의 결과를 낳았다’며 하워드 진과 같이 콜럼버스의 ‘어두운 면’을 분명히 지적했다. 정 전 사장은 “특히 모리슨은 콜럼버스 탐험의 결과를 ‘대량학살(genocide)'이라고 평가했는데, 매우 혹독한 단어를 쓴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를 없게 할 수도 있고 역사 기술에 있어 불리한 사실을 다 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모리슨 교수는 그런 짓은 안 했습니다. 대놓고 거짓말을 하거나 중요한 사실을 빼버리지도 않았죠. 대량학살했다는 이야기도 썼으니까요.”

하지만 정 전 사장은 모리슨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체 수백 페이지의 콜럼버스 전기 중에 대량학살의 잘못을 지적한 분량이 고작 한 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콜럼버스의 험난한 항해를 묘사하면서 ‘콜럼버스가 가진 불굴의 항해가정신’을 책 전반에 걸쳐 강조했다. ‘콜럼버스에게 잘못과 결점이 있었으나 이것들은 콜럼버스를 위대하게 만드는 필요악’이며 ‘끈기와 신앙을 바탕으로 항해인으로서 핵심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모리슨이 책 말미에 적은 결론이다. 정 전 사장은 “모리슨이 대량학살이란 말을 썼기에 거짓말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정 전 사장은 “지배자, 강자, 승자가 쓴 역사, 민중이 소외된 역사를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 조창훈

“진실을 아예 빼먹거나 거짓말했다 나중에 들키면 망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이 드러나면 작자에 대해 반란의 마음이 일어나는 거죠. 왜 중요한 사실을 빼먹었냐면서. 하지만 사실을 이야기 한 후 재빨리 엄청나게 많은 다른 정보 속에 묻어버리는 방법도 있어요. 그러면 독자들은 전염성이 강한 침묵처럼 받아들이게 되죠.”

정 전 사장은 이런 역사기술 태도가 “대량학살은 콜럼버스의 ‘업적’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편향된 역사관을 독자들에게 심어준다”고 비판했다.

   
▲ 콜럼버스의 항해를 다룬 영화 '1492 Conquest of Paradise' (1992년 작)의 포스터. 반젤리스가 작곡한 주제곡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콜롬버스의 원주민 학살을 기독교 전파, 원주민 교화, 탐험 등으로 미화한 대표적 작품이다. ⓒ Flickr

역사의 취사선택, 필요하지만 과오를 외면 말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핼릿 카(E. H. Carr)의 정의를 생각해봅시다. 종교인들에게 경전은 단순히 수천 년 전 성인들의 말을 꺼내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경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재해석해야 합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이야기를 단 한 페이지만 꺼내놓고, 탐험과 개척으로 미화한 엄청난 후속 이야기 속에 묻어두면 안 됩니다.”

정 전 사장은 그렇다고 해서 사실의 선택, 단순화, 강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마치 지도제작자가 강과 산, 언덕 등 수많은 지형 중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만 골라서 그려내듯, 역사가 또한 스스로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사건을 취사선택하고 단순화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지도제작자와 역사가가 사실을 취사선택하는 목적은 다르다. 지도 만드는 사람의 선택은 오로지 지도 사용자를 배려하는 기술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 반면 역사가의 정보가공은 이념적이다. 정 전 사장은 “역사는 한일관계, 여야대립 등 현실세계의 갈등 속으로 스며들며, 이때 선택적으로 강조된 역사는 정치, 경제, 인종, 혹은 국가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 "언론인은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정연주 전 KBS 사장. 역동적인 몸짓이 인상적이다. ⓒ 조창훈

역사가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 판단에 의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현실의 특정 이해당사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정 전 사장은 “특히 우리나라처럼 사상과 입장이 양분된 사회에서는 역사가 더욱 악용되기 쉽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콜럼버스 영웅주의를 내세우면서 그의 뒤를 이은 유럽의 항해자들을 ‘개척자’로 칭송하고, 대량학살은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는 행위는 독자를 배려한 역사서술이 아닌 이념적 강요가 된다. 정 전 사장은 “이렇게 왜곡된 역사서술은 장차 일어날 불의마저 합리화한다”고 말했다.

정 전 사장은 하워드진의 <미국민중사>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죄 없는 이들이 수없이 죽어간 잔혹한 역사를 ‘안타깝지만 진보를 위한 대가’라고 쉽게 받아들이는 행위는, 마치 히로시마 원폭 투하, 베트남의 수많은 죽음을 서구식 근대화를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정리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독재정권 치하의 피해자 등 과거의 잔혹한 행위들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서 호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 전 사장은 “우리가 그 아픔들을 정보의 홍수 속에 묻어놓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워드 진의 말대로 과거의 아픔들을 “마치 원자력 폐기물을 드럼통에 넣어 땅에 묻어 버리듯이” 고스란히 폐기처분한 탓이다.

정 전 사장은 “정복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지 말자”고 촉구했다. 콜럼버스 영웅주의를 수용하고, 희생자들을 그냥 지나치고, 살인과 정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인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후배’들을 찬양하는 역사는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자들이 이 나라를 대변하는 ‘지배자들을 위한 역사’일 뿐이다. 우리나라 도서관을 가도 역사는 '왕의 역사'가 대부분이다. 민중의 구체적인 삶은 없다. 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역사는 지배자들 입장에서 기술된 권력에 의한 기억이며 정치가들이 고통받는 수백만 명을 무시한다"고 말했다. 역사가 ‘강자’의 기억대로 짜 맞춰지기 쉽다는 뜻이다.

정 전 사장은 “황석영의 <장길산>은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조선 후기 가난한 민중의 삶을 자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일제 치하에서 핍박받는 조선 민중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내서 일제강점기가 한국 근대화에 일조했다는 역사관에 균열을 일으켰다. 하워드 진은 콜럼버스를 탐험가라 보지 않는 등 역사를 지배자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정 전 사장은 “이런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교과서에서는 다루지 않는다”며 “대신 주류가 된 왜곡된 역사가 사람들을 마취시킨다”고 말했다.

언론인은 빈자의 울부짖음에서 정의를 찾아라

정연주 전 사장은 ‘역사 속 국가’에 대해 “국가의 기억을 우리의 것으로 착각해 받아들여선 안 된다”며 “국가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복자-피정복자, 자본가-노동자, 인종과 젠더 등 국가라는 체제 속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 이해관계의 충돌은 감춰버리고 왕조 이야기나 하는 역사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는 기득권이나 강자가 가진 권력의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사장은 “저널리스트의 역사관도 그래야 한다”며 “지배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국민의 눈높이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인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에는 권력가 편에 서는 목소리가 너무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는 약자들의 마이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 정 전 사장은 수십 년 '망명생활'을 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그는 "하루 30분이라도 외신보도를 접하라. 콩나물콩이 흘려주는 물을 맞으며 쑥쑥 자라듯, 여러분 외국어 실력도 일취월장한다"고 조언했다. ⓒ 조창훈

정 전 사장이 주장하는 것은 단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가해자를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희생자들의 눈물과 분노를 과거에만 초점을 맞추면 현재에 필요한 도덕적 에너지를 전부 소진하게 된다. 당장 해야 할 도덕적 결단과 참여에 필요한 에너지를 다 소진할지도 모른다. 희생자와 집행자의 경계도 뚜렷하지 않다. 단기적으로 희생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가해자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정 전 사장은 “용산 참사에서 철거 현장의 용역요원들도 같은 하층민들이었고, 중앙정보부의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희생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압제자의 타락에 젖은 사회적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공격하는 ‘집행자’가 된 사례들이다.

정연주 전 사장은 만약 자신이 역사를 기술한다면 “정부와 정부의 시도들을 회의적인 입장에서 기술할 것”이라고 말했다. 희생자들이 폐쇄된 공간에 갇혀 같은 약자를 박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고 진술하는 것이다. 정 전 사장은 “희생자들을 낭만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다“며 “냉정하게 이들의 잘못도 가감 없이 기술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가슴을 울린 한 구절을 우리에게 전해줬다.

“빈자의 울부짖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연주 조효제 정희진 김혜원 이문재 이택광 신형철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 : 문중현 기자

[이성훈 기자]
단비뉴스 청년팀장 이성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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