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양특강]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
주제 ① 동북아 국제정치와 북한의 역학관계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으로 확 떴잖아요? 얼마 전 그가 제 소속 대학에서 강연했는데, 그때 가장 궁금했던 게 후쿠야마 교수가 역사가 끝났다고 말했을 때 실제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지금도 그 말이 유효하다고 생각하는지였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사회교양특강’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가 말한 ‘역사의 종언’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며 강의를 시작했다. 구 교수는 ‘역사의 종언’의 핵심은 “냉전이 끝났다는 것”이라며 질문을 이어갔다. “냉전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냉전이 뭐죠?”

▲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사회교양특강에서 강의하고 있다. © 강명연

강대국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냉전’

한 학생이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말하자 구 교수는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냉전이 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시작해 소련이 붕괴한 1991년에 끝났다고 보면 그 사이 두 차례 세계대전 같은 강대국끼리 큰 전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냉전’이란 말은 철저히 강대국 중심의 서술어라는 것이다. 구 교수는 냉전 기간에 일어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 했다.

“여러분이 역사책에서 접한 ‘러일전쟁’, ‘청일전쟁’이라는 용어에는 전쟁에 참여한 주체들이 드러납니다. 반면 ‘베트남전쟁’, ‘한국전쟁’이라는 말에는 전쟁의 주체가 드러나나요?” 

우리가 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미국 관점에 따르는 것이라고 구 교수는 말했다. ‘이라크전쟁’도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시각을 비판 없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냉전’,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같은 용어에서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와 서구중심주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에서도 그런 사고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우리가 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미국 관점에 따르는 것이라고 구 교수는 말했다. © wikimedia

원주민에겐 황당한 ‘베트남전쟁’과 ‘신대륙 발견’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표현은 아메리카 원주민 입장에서 황당한 말입니다. 원래 있었던 땅인데 발견했다고 말하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뭐가 되나요?”

구 교수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 대신 ‘콜럼버스를 계기로 두 문명이 만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그는 심각한 오리엔탈리즘을 보여주는 사례로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신학계에서 발생한 논쟁을 언급했다.

“스페인 신학계에서 신대륙 발견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는데, ‘라틴아메리카에 있던 원주민도 사람인가’라는 거예요.” 

구 교수는 이 논쟁이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논쟁의 내용이 항상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문제는,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을 너무 많이 죽여서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생겼죠. 아메리카 사람들을 그만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 겁니다. 이런 논쟁을 통해 원주민도 사람이고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 논리를 바꿔간 거죠.” 

▲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 대신 ‘콜럼버스를 계기로 두 문명이 만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구 교수는 지적했다. © telegraph

세력균형에 따른 일시적 평화

구 교수는 냉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냉전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대립이라고 본다면, 냉전의 시작은 소련에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라고 말했다. 미∙소 대립을 강조한다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냉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국제정치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국가들의 모임인 제3세계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라고 그는 말했다.

구 교수는 다른 관점에서 냉전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냉전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과 무관한 강대국 간 관계로 보는 것이다. 이는 고대, 중세, 미래에도 있을 수 있는 대립이고, 그 국가의 성격이 무엇이든 강대국끼리 대립하면 냉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냉전 기간에 강대국들이 전쟁을 벌이지 않은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상호확실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로 인해 공포의 균형이 이뤄졌기 때문에 전쟁이 억제될 수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평화(peace)는 무슨 뜻일까요? ‘peace’를 ‘평화’라고 번역한 건 후쿠자와 유키치입니다. ‘평화’는 그가 번역할 당시 일본에는 없던 개념입니다. 평화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이러한 개념을 한 번도 인식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 교수는 서양의 근대 주권국가와 동아시아 국가들은 평화라는 개념을 다르게 인식했다고 지적했다. 서양에서 평화란 세력균형을 의미했다. 유럽 국가들이 서로 패권을 겨룰 때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대자소’란 큰 나라를 섬기고(사대) 작은 나라를 보호(자소)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관점에서 평화란 중국을 중심으로 명확한 위계가 있는 것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곧 평화를 의미했다.

‘역사가 끝났다’는 후쿠야마 말은 유효한가

서양에서는 국가간 세력균형을 통해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로 인식했던 반면 동아시아에서 평화는 ‘사대자소’의 관계를 뜻했다. 구 교수는 미국적 평화와 중국적 평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북한이 왜 핵을 보유하려고 하는가’, ‘그것이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 중심의 사대자소와 근대 주권국가 사이의 세력균형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통일은 중국의 이익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이 통일 이후에도 한미동맹을 유지한다면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반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완승을 거뒀기 때문에 역사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 교수는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빠르게 수용해온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고,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북한이 아직까지 붕괴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후쿠야마의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완승을 거뒀기 때문에 역사가 끝났다고 주장했지만, 구 교수는 후쿠야마의 주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 wikimedia

미국 주류는 중국의 부상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구 교수는 말했다. 첫째는 국제사회에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미∙중 간 세력균형이 이뤄지기 때문에 전쟁이 발생하지 않고 제한적 평화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는 세력전이(power transition)로 보는 시각이다. 세계에서 패권이 바뀔 때마다 큰 전쟁이 일어났고, 지금이 바로 패권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패권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2008년 발생한 세계 경제위기다.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미국 중심의 경제질서가 위기를 맞은 반면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설립을 계기로 중국이 국제경제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구 교수는 앞으로 국제관계 재편이 세력균형이건 세력전이건 한국에게는 매우 갑갑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안보는 미국에게, 경제는 중국에게”라는 뜻의 ‘안미경중’(安美經中)을 이야기 했듯이 미∙중 관계의 변화 속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전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일 관계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에 걸림돌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지는 않지만 견제하려 합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2009년 미국 행정부가 시행한 재균형정책(rebalancing)입니다. 정책의 핵심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강화, 그리고 한미일 삼각동맹의 강화예요.”

구 교수는 미국은 외교적 관점에서 한∙미 관계가 악화하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한∙미∙일 정상은 네덜란드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어색한 분위기로 정상회의를 진행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가 가능해진다고 보고 있다고 구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위안부 사과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 따른 한국과 일본의 적대관계는 미국이 추진하는 재균형정책의 일환인 ‘아시아 회귀’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중심의 경제질서가 흔들렸고 반면 중국이 국제경제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2014년 G20 정상회담에서 만난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들.  © wikipedia

“중국은 신형대국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부패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무원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마오타이주(중국의 전통 증류주) 반주도 못 하게 하는 걸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구 교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구상하는 미∙중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신형대국관계를 통해 양국이 협력하는 틀을 만들자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중국을 새롭게 개조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스스로를 ‘대국’이라고 부르지만 공산당 내부에는 세 부류 다른 세력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국이다’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 ‘전통적 의미의 사회주의를 고수해야 한다’ 아직까지 중국에는 개도국 지위를 지켜야 한다는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 교수는 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아시아 회귀’를 주도했던 힐러리가 다음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재균형정책을 훨씬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는 미∙중

“미국은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이 쌓아둔 외환보유고 덕분에 현재 소비 수준을 유지할 수 있죠. 반면 중국은 자기들 소비를 유보하고 있는 거예요.”

▲ 1944년 국제통화질서를 제도화한 브레튼우즈 협정이 체결된 이후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금태환이 시작됐다. © wikipedia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다시 냉전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 구 교수는 부정적 견해를 드러냈다. 현재 미중 관계가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미소 관계와 유사하지만, 경제적으로 미중이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외환보유고 형태로 1000조 이상 미국 채권을 보유한 중국이 이 채권을 시장에 팔면 미국은 엄청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구 교수는 지적했다. 미중은 불안정하지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순적 경제 관계를 맺으며 공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주식이나 달러가 아니라 주가지수나 환율을 사고파는 옵션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위험회피전략으로 옵션거래나 선물거래를 하는 거예요. 닉슨이 금태환제를 깨뜨리면서 이런 투기적 거래가 가능해졌습니다.”

1944년 국제통화질서를 제도화한 브레튼우즈 협정이 체결된 이후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금태환이 시작됐다. 1930년대 대공황이 닥쳤을 당시 금본위제를 고집한 것이 경제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반성에 따른 조처였다. 이후 세계 경제는 달러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의 국제수지 불균형으로 국제유동성 문제가 불거졌고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제 폐지를 선언하면서 변동환율제의 막이 열렸다.

미국은 달러를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특권을 얻었지만 달러 공급이 증가하자 그 가치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미국은 떨어진 달러가치를 조정하기 위해 1985년 일본과 화폐가치를 강제로 조정하는 플라자 합의를 체결했다. 엔화가 평가절상됨에 따라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

다자협력이 가장 이상적인 세력균형

“노예가 노예인 걸 알게 하는 건 선수가 아닙니다. 스스로 노예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하면서 노예의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 헤게모니적 지배입니다. 알아서 기게 하는 거죠.”

구 교수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에 담긴 헤게모니적 지배를 지적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그의 책 <옥중서신>을 통해 유행시킨 개념인 ‘헤게모니’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방식은 강제적인 동시에 피지배자의 자발성을 내포한다. 지배자의 ‘강제’와 피지배자의 ‘동의’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미국인들은 헤게모니를 표현할 때 ‘리더십(readership)’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구 교수는 말했다. 이 경우 ‘동의’에 방점이 찍힌다.

구 교수는 한국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가장 이상적인 세력균형 상태는 다자적 협력 틀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다자안보협력을 통해 권력을 공유하는 제도를 만들면 북핵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6자회담은 동아시아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협력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구갑우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 강명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학기 <사회교양특강>은 조준상 박인수 홍기빈 김동춘 구갑우 전중환 박상훈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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