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양특강]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주제 ① 한국 자본주의의 경로 이동 I

“여러분 키보드 보시면 거의 다 쿼티(QWERTY) 자판 사용하시죠? 그런데 과연 쿼티가 효율성이 높은 자판일까요?”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사회교양특강에서 홍기빈 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장은 한국 자본주의 문제를 '경로의존성' 개념으로 풀이했다. ⓒ 박진우

쿼티는 결코 효율적인 아닌데도 대부분 쿼티 자판을 사용한다. 한글 두벌식보다 세벌식이 우월한 자판인데도 사람들은 익숙한 두벌식을 쓴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이처럼 사람들이 한번 쓰기 시작하면 효율이 낮더라도 계속 쓰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그는 이 개념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경로 이동에 대해 설명했다.

경로의존성에 빠진 재벌

홍 소장은 한 사회 영리활동의 활성도를 확인하려면 국내총생산(GDP)을 확인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재벌이라는 특수한 기업문화가 자리 잡은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의 수익률이 어떤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자본을 축적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재벌기업이 산업영역에서 어느 정도 지배력을 행사하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은 대기업 위주 한국 경제구조가 경로의존성을 벗어날 수 있는 변곡점이었다. 그러나 그 뒤 양상은 재벌의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하는 제도들이 마련됐다. 재벌은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전보다 훨씬 더 자본 축적을 강화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대기업은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급격한 수준으로 이윤을 축적했다.

▲ 기업 전체의 소득에 견주어 삼성그룹, 상위 4대 재벌, 30대 재벌의 순이윤 비율을 표현한 그래프로 재벌기업의 자본축적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 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

기업 전체의 소득에 견주어 삼성그룹, 상위 4대 재벌, 30대 재벌의 순이윤 비율을 표현한 그래프로 재벌기업의 자본축적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과거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습니다. 90년대 정점을 찍고 난 뒤 급격히 감소해 현재는 탈산업사회, 지식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몇 개 기업이 한 사회에 갖는 지배력이 커지고 있어요. 문제는 과연 이런 대기업 위주 경제구조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지금 재벌기업은 과거 국가가 막대한 자원을 지원해줬기에 자금력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기만 할 뿐 예전처럼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지 않는다. 재편되는 21세기 산업구조에 변화를 무기 삼아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높은 자영업자 비율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고용률이 높으면서 그만큼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나라도 없다. 한국의 자영업은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처럼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이른 나이에 퇴직한 사오십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다.

홍 소장은 현재 상황을 방관하면 향후 경제성장은 침체되고 몇몇 기업이 장악한 비대칭 권력이 확대돼 산업전체가 역동성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어쩌면 그것이 대한민국이 맞이하게 될 암울한 경로의존성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경제성장의 오싹한 파트너, 자살

산업활동이 활발해지면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누릴까? 산업은 날로 효율이 높아지고 벌이를 늘려가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삶을 포기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내총생산이 늘어나는 만큼 자살률도 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저버린 ‘자살친화적 성장’의 결과다. 이렇게 성장과 자살률이 밀접하게 연관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 1인당 GDP가 늘어남에 따라 자살률이 거의 같은 기울기로 높아진다. 두 지표의 상관계수는 0.96(똑같이 상승할 경우 1) 이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 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

“몇 달 전 대통령께서 국민소득 4만 불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오싹했어요. 얼마나 자살하게 될까? 경제성장도 좋은데, 저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연구를 하고 대책부터 세워야죠. 그러지 않고서는 아마 중동에서 다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한국사회 경제성장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걸까? 홍 소장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가 “사회가 개판이 되든 말든 경제성장의 결실은 소수 몇 개 기업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국시를 내걸고 사회를 관리해온 탓이다. 산업이 사람에게 등을 돌린 이유는 국가와 법적 제도가 국민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보고 싶으면 서울역 뒤 쪽방촌을 가보세요. 힘든 처지의 노인들이 많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 안 하는 푸어(poor, 빈곤층)는 거의 없거든요. 일 안 하고 직장 안 찾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대부분 워킹푸어(working poor, 근로빈곤층)예요. 특히 지금 우리나라 60대 위로는 정말 힘들게 일했어요. 근데 그 결과가 돈 한 푼 없고, 옷만 걸치고, 정신적으로 힘든 거예요. 사람을 산업폐기물처럼 내버린 겁니다. 경제성장의 비밀은 대부분 사회를 착취한 거예요. 대부분의 결실은 다시 투자해서 더 잘 산다는 명분 아래 몇 개 기업들한테 일방적으로 몰아준 거죠.”

‘한강의 기적’이 남긴 한국자본주의의 병폐

홍 소장은 한국사회가 발전해온 경로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은 다른 나라가 100년 이상 걸릴 경제성장을 삼사십년 만에 압축적으로 해냈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압축성장의 비결은 모방이었다. 한국은 선진국이 이미 해놓은 공장 매뉴얼 등을 그대로 가져와서 뚝딱뚝딱 빠르게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했다. 생산기술의 혁신은 없고 잘 된 사람, 잘 된 기업 것을 그대로 베끼기만 한 방법이었다. 공사판에서 콘크리트 담 쌓는 과정을 일본식으로 ‘공구리 친다’고 표현하는데, 홍 소장은 한국 경제성장 모델을 ‘공구리 경제’라 불렀다.

‘공구리 경제’는 인간 관계도 위계적으로 바꿨다. 공사판에서 매뉴얼대로 빨리 만드는 데 머리를 쓸 필요는 없다. 윗사람이 시킨 일을 빨리 수행만 하면 됐다. ‘공구리 경제’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인간 관계를 낳았다. ‘줄빠따’는 예전 군대에서 맨 윗 상관이 ‘빠따’로 때리면 중간간부와 말단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빠따’를 맞게 된다는 뜻인데, 홍 소장은 한국사회 구조도 ‘줄빠따 시스템’이라 불렀다.

이는 단지 군대나 공사판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60년대 형성된 우리나라 사회 시스템 대부분이 철저한 상명하복이다. 독재정권 때 가장 심하긴 했지만, 학교 선후배 관계와 군대 선후임 관계 등에서 여전히 남아있다. 남녀, 교수와 학생, 목사와 신자 등의 여러 사회관계는 여전히 민주적이지 않다. 산업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이 ‘줄빠따’도 늘어났다. 87년에 민주화가 되긴 했지만 민주적인 토론이나 합리적 의사과정을 찾기 힘들었던 이유다.

“안철수 현상은 이런 한국사회의 문제를 사람들이 곧바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겁니다.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한국사회란 게 ‘공구리 경제’, ‘줄빠따 시스템’이었던 거죠. 근데 이게 비전은 없잖아요? 그걸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안철수는 ‘아이티(IT)’랑 ‘힐링’의 결합이잖아요. 아이티 쪽이니까 ‘공구리 경제’는 아니고, 힐링을 말하는 사람이 ‘줄빠따’ 칠 것 같진 않은 거죠.”

벼랑 끝의 한국 자본주의

한국 산업사회구조는 탈산업사회로 진입한 지 오래다. 노동인구 전체에서 제조업 종사자 비율이 90년대 초에 정점을 찍고 지금까지 일관되게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의 산업구조는 바뀌고 있지만, 60년대 만들어진 한국 자본주의의 제도적인 특징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경로의존성이 사회가 파괴되는 속도와 재벌기업이 산업에 갖는 지배력에 가속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자본주의가 처해있는 상황이라고 홍 소장은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국 자본주의에는 미래가 있을까? 한국 재벌기업은 6,70년대 까지만 해도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실제 산업에 투자하고 고용을 늘렸다. 현재 재벌기업이 ‘한국의 산업을 21세기형에 맞도록 새로운 산업구조로 재편하려는 능동적인 이니셔티브와 역량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최소한 지금까지는 ‘굉장히 비관적’이라고 홍 소장은 말했다.

테슬라 모터스의 최고경영자 엘론 머스크는 화성 식민지 건설사업과 진공관 고속철도 개발을 지휘하고 있다. 테슬라 모터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재벌도 상당한 힘과 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6,70년대처럼 투자를 하기는커녕 손에 쥔 돈을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재벌들은 빵집이나 순대집을 열어 지역의 골목상권 없애는 일이 고작이다. 자연스럽게 현재 한국 경제구조 안에는 돈 되는 산업도 없고, 생겨나는 일자리도 질 낮은 아르바이트 자리뿐이며, 노동생산성도 낮다.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을 다시 투자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1천조원을 넘은 지 2년 됐지만, 10대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쌓아놓은 돈은 516조원 정도로 추산한다. 기업들은 투자할 곳이 없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 열강하는 홍기빈 소장과 수업을 듣고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 ⓒ 박진우

취직한 사람들의 비율을 나타내는 고용률과 자영업비율을 비교해보면 대부분 OECD 국가는 고용률이 높고 자영업비율이 낮은 형태를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고용률은 낮고 자영업비율은 높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이 비슷한 모습인데, 이 두 나라는 자영업에 오랜 전통이 있다는 점과 그 종류가 다양해 자영업 자체가 하나의 산업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자영업은 취직을 못했거나 조기 퇴직한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영업이 높다는 것은 노동인구 중에서 자본이 조직하는 산업에 취업해 일하는 비중이 낮다는 의미다.

이러한 결과는 노동생산성 저하로 나타난다. 1인당순국민소득과 노동시간당GDP를 산정해보면, 우리나라는 둘 다 낮은 수치를 보여준다. 돈 될 만한 직업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을 아무리 오래 한다고 해도 창출하는 GDP가 작고, 산업이 효율적으로 조직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미래성이 있는 좋은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고, 낮은 노동생산성에 노동인구가 줄어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성장기조로 들어간 것이 당연하게 보인다고 홍 소장은 설명했다. 결국 6,70년대 만들어진 초기 조건으로 경로의존성을 50년 겪어오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걸 놔두면 경제성장은 침체되고, 사회 파괴는 심해지고, 몇 개 경제권력 집단의 비대칭적인 권력은 가속화할 거예요.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로예요. 우리의 업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학기 <사회교양특강>은 조준상 박인수 홍기빈 김동춘 구갑우 전중환 박상훈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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