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길’

▲ 이빛나

어린왕자가 여우를 처음 만났을 때,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너에게 ‘길들여지지 않아서’ 같이 놀 수 없다고 말한다. 어린왕자가 묻는다.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여우가 대답한다. “이제는 많이 잊힌,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사전은 ‘길들이다’의 뜻을 ‘어떤 일에 익숙하게 하다’로 정해놓았다. 얼핏 여우가 설명한 의미와 달라 보이지만 어떤 상황과 사람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는 모두 지속적인 ‘관계’ 속에 가능한 일들이다. 그러나 여우가 말했듯 ‘관계를 맺는다’는 과정은 잊혀지고 ‘익숙해진다’는 결과만 남은 채로 많이 사용되곤 한다. 

길들여져서일까? 의정부 화재로 130여 명 사상자가 발생하고 200여 명 난민이 생겼다는 기사에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음날 LG 가스누출 사고로 2명이 사망한 보도에는 ‘별로 안 죽었네’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쌍용자동차노조의 위험천만한 굴뚝농성도, 이들을 굴뚝 위에 올린 해고 사태에 따른 사망자가 23명이라는 숫자도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지난해 4월 16일의 ‘300여명 사망’이라는 헤드라인이 너무 충격이었나, 웬만한 사망사고·사건으로는 더 이상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는다. 해고 사태, 도시 난민, 자살, 아직도 계속되는 세월호 진상 규명 시위에도 사상자수만 머리에 박힐 뿐 그 너머에 촘촘한 사회적 관계망과 여전히 진행중인 과정은 쉽게 잊는다. 아니, 사상자수마저 익숙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슬픔과 좌절감 속에서 사건의 원인과 그 원인이 되는, 우리가 ‘길들여져’ 보지 못했던 사회적 관행들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로 가지 않고 또 한번 익숙한 관계망에 파묻히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붐비지 않고 노란 리본만 흩날리는 광화문 앞과 연이은 사건에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보여준다. 쌍용자동차노조의 피맺힌 절규보다는 이효리가 티볼리 모델을 스스로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사건을 더 크게 보도하는 언론이 이를 확신하게 한다. 우리는 죽음, 단절, 비명에 길들여지고 있다. 

▲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익숙해진 것에 책임이 따른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회적 비극에 길든다고 한다면, 어떤 책임을 져야할까. ⓒ flickr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적 사고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익숙해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 사회를 길들이는 사회적·구조적 관계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질문하고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내재적으로 스스로를 다시 길들이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길들인다는 것’은 안일함과 반복 속에 본질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들판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지내던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져서 얻은 것은 ‘기다림’과 떠나는 어린왕자에 대한 ‘곱씹음’이었다. 편안하기보다 슬픔을 감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질문하고 분노하는 것에 가깝다. 

여우는 여우를 떠나 장미에게 돌아가는 어린왕자에게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너는 잊어선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너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으니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5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중앙대 사회학과 4학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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