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수상작/첨삭후기

[수상작]

장원: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 이빛나 (중앙대 사회학과 4학년) 
우수: <익숙한 길에 함정이 있다> 강연우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길에서 죽은 '친구'를 애도하며> 박성희 (충남대 졸, 저널리즘스쿨 입학)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유선희 (저널리즘스쿨 2학년)
      <기꺼이 돌아가련다> 이유지 (부산대 국어교육과 4학년)

지난 1월에 열린 제10기 ‘대학언론인 캠프’ 이후 내게 보내온 칼럼들 중에서 5편을 골라 <단비뉴스> [상상사전]에 9일(월) 밤부터 싣습니다. 저널리즘스쿨 재학생이 보내온 글도 있었는데 첨삭은 진작 해두었지만 방학 중에는 재학생들의 지난 2학기 과제와 강연기사들을 <단비뉴스>에 내보내느라 수상작 발표가 늦었습니다.

장원과 우수작으로 뽑힌 이에게는 격려의 뜻으로 작으나마 책 1권씩(장원은 2권)을 선물하겠습니다. 수상자는 내가 읽히고 싶은 아래 책들 중 읽고 싶은 걸 골라 나에게 메일(hibongsoo@hotmail.com)이나 전화(010-9005-5680)로 연락하십시오. 주소를 알려주면 인터넷서점을 통해 직접 보내겠습니다.

수상작은 첨삭본을 열어보면 잘못된 글쓰기 습관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을 겁니다. 수상작이 아닌 칼럼은 첨삭한 것을 필자에게만 메일로 보냅니다. 여러분 글에 나타나는 공통의 문제들은 과거 피투성이 백일장의 첨삭후기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선물하고 싶은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 헬렌 토머스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감정독재> 강준만
<우리글 바로쓰기 1> 이오덕
<벼랑에 선 사람들> 단비뉴스
(그밖에 읽고 싶은 책 아무거나)

[첨삭후기]

이번 캠프 칼럼쓰기 제시어는 ‘손’과 ‘길’이었는데, 응모작은 대부분 ‘길’을 주제로 한 것이었지만 두 주제를 모두 보낸 열성파도 있었다. 장원으로 뽑은 칼럼은 '길'을 '길들여진다'는 개념으로 확대해 엄청난 대형사고가 빈발하는 한국사회에서 ‘길들여진다는 것’이 위험에 익숙해지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자기 주장을 펴면서도 ‘~해야 한다’는 식의 ‘논설 투’ 대신 생텍쥐페리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주인공과 여우의 대화를 통해 ‘길들여진다는 것’은 올바른 관계의 회복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자연스레 강조했다. 그렇다. 친구 사이든 정부와 국민 사이든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질문하고 때로는 분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든 애완견이든.

수상작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글쟁이로서 재능이 엿보이는 글도 꽤 있지만 아직은 직업으로서 언론인이 되기에는 상당히 미흡한 글이 다수였다. 프레임이 엉성하거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고 문법 오류도 속출해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된 글이 많았다. 수상작 중에도 비슷한 증세들이 나타났으나 발상이 아까워 수상작에 끼워 넣은 글이 있다.

제시어 ‘길’에 대해서는 수상작들의 프레임 수정과 첨삭으로 대신하고, 여기서는 응모작이 적었던 ‘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

‘손’은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 시간의 기록이다

손은 삶의 궤적과 현재의 성취 여부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손은 사람의 직업이 명기된 신분증이다. 거의 모든 일이 손을 통해 이뤄지니 손에 직업의 흔적이 남는다. 발은 신발 속에 감출 수 있고 얼굴은 화장이라도 할 수 있지만 손은 감출 수 없다. 상대방이 악수를 청할 때 마주 내밀지 않으면 ‘원수’가 되는 게 손이다.

나는 <사상계>를 비롯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잡지 7종을 대부분 갖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뿌리깊은 나무>와 <마당> 창간호를 사던 날의 첫 인상을 잊을 수 없다. 창간호의 표지 사진은 둘 다 ‘손’이었다.

▲ 한국을 대표하는 두 잡지였던 <뿌리깊은 나무>와 <마당>이 창간호에 둘 다 손 사진을 실은 것은 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 이봉수

서가에서 창간호들을 뽑아보니 <뿌리깊은 나무>는 내가 대학 3학년이던 1976년 3월에 창간됐는데 사진설명은 이랬다. ‘예순다섯 살의 농부가 일과 햇볕과 추위로 거칠어진 두 손으로 쌀을 받들어 올리면서 “지난해에 농사가 잘 되기는 되었는데…” 하고 말문을 열었으나 뒷말을 잇지 못했다.’

81년 9월에 나온 <마당> 창간호 사진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손의 값어치를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호모 파베르(공작인)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손은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몫을 담당해왔으면서도 언제나 가장 쉽게 외면당해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손이 아니라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외면당해왔다고 해야겠다. 일한 사람이 일한 만큼 당당한 대접을 받기는커녕 생존권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멸시당하고 있는 게 고도 자본주의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손은 자본가와 노동자를 구별짓고 노동자 중에서도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를 구별짓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를 습관과 취향, 옷차림새를 넘어 몸으로 연장해볼 수 있다, 몸에 익숙한 행동과 처신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 몸을 보는 타인의 시선도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거리의 창녀였던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은 사업가 루이스(리처드 기어)를 만나 부르주아의 아비투스를 속성으로 학습하고 명품으로 치장한다. 그러나 신데렐라가 된 비비안에게 정작 가장 큰 상처를 준 이는 바로 루이스였다. “난 한번도 널 창녀 취급한 적 없어.”  “방금 그랬잖아요.” '그녀의 과거'가 루이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양사회에서도 농사짓는 사람들은 제대로 대접받은 적이 없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도 '농업이 소중하다'는 말이지 '농부가 소중하다'는 뜻이 아니다. '소중한 사람'은 농업생산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잉여가치를 가져간 이들이다. 청나라 서태후가 10㎝도 넘게 손톱을 기른 것은 평생 한번도 일을 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자기과시였다. 부패하고 무능한 청나라는 결국 망했지만 자본의 위세는 날로 커지고 있다.

노동자가 대접받는 자본주의를 통해 마르크스의 저주를 보기 좋게 뒤집는 건 불가능할까? 손에 남은 상처와 굳은살, 닳고 갈라진 손톱이 흉측한 낙인이 아니라 자랑스런 문신이 되고, ‘일하는 손’이 명예를 회복하는 날은 언제쯤일까? (이봉수 교수)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