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자기소개서’

▲ 황윤정 기자
영화 ‘본 아이덴티티’ 주인공 제이슨 본은 사고로 기억을 잃고 ‘내가 누구였나(Who was I)’란 질문과 싸운다.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 얻은 답은 자신이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기구의 이해관계에 맞게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굳이 CIA 비밀요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내가 누구였나’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받는다. 그 배경에는 내가 얼마나 경쟁력 있는 산업인력인지 평가하는 자본권력이 있다. 고용시장과 자기소개서 얘기다.

자기소개서 쓰기는 ‘내가 누구였는지’ 답하는 작업이다. 성장 과정, 직무와 관련된 경험은 물론, 다양한 교내외 활동 사항을 통해 조직 적합도를 증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 경험들은 조직의 가치와 비전에 부합하도록 편집된다. 모든 경험을 논리적이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때로는 파편화한 행적과 기억이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원 동기와 입사 후 포부’ 항목 앞에서 나의 과거는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포장된다.

제이슨 본의 자아 찾기가 결국은 자유를 획득하는 것으로 귀결됐다면, 우리의 물음은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충실한 직원이 되는 것으로 끝맺는다. 자신을 규명하는 제이슨의 작업이 자발적 의지인 반면, 우리의 규명은 비자발적이다. 제이슨은 체계적 훈육으로 조직에 위협이 될 정도의 강력한 살인병기가 됐지만, 우리는 고용 권한이 있는 ‘갑’에 대한 철저한 ‘을’로서 조직에 반기를 들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여기에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영화 속 CIA 비밀 조직 ‘트레드스톤’은 실체가 있는 훈육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고용시장은 지원자가 자신이 훈육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취업준비생들 사이에 도는 말 중 ‘인생의 공백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백 기간이 있으면 그 기간을 나태하게 보낸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채워진 공백들은 ‘스펙’이 되어 이력서의 빈 칸을 메운다. ‘내가 누구인지’ 답을 내릴 권한을 박탈당한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시받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으로 훈육된다.

현대인의 정체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의 규율 권력을 탐구한 미셸 푸코는 근대적 감옥의 초기 모델을 메트래(Mettray) 소년감화원에서 찾는다. 메트래에서는 하루 10시간 노동 통제가 이뤄진다. 체조, 소대훈련, 나팔과 호각 소리에 맞춘 행진 등을 지도하며, 청결 검사, 목욕 감독을 한다. 푸코는 이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신체의 조립 방법은 개인의 구체적 지식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고, 기술의 습득은 행동방식을 결정하고, 적성의 획득은 권력 관계의 확립과 뒤얽힌다”고 말한다. 공백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교묘하게 개인을 권력 관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권력은 정보를 통해 개인을 통제한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주민등록증, 계좌번호, CCTV 등의 정보는 그물처럼 조밀하게 짜여 개인을 감시한다. 그러나 개인을 감시하는 도구는 이런 서류에만 있지 않다. 이력서와 자소서를 가득 채운 ‘스펙’들도 개인을 규격화해 통제를 용이하게 한 감시의 결과물이다. 몇 년 후 만날 면접관에게 자신의 경쟁력을 강조하기 위해 청년 시절을 통째로 저당 잡히는 사회다. ‘자소서’ 용 정체성은 과연 나의 정체성과 부합하는가? 나도 모르겠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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