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관계’

▲ 송두리 기자
누구나 원만한 관계를 맺는 건 아니며 누구나 별 일 없이 사는 건 아니다. 살다 보면 반추하기조차 싫은 기억도 갖게 된다. 다만 보통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 뜨고 밥 먹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렇게 살아간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남자 주인공 팻(브래들리 쿠퍼)도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뒤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혼식장에서 울렸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되살아나 자신도 모르는 새 이성을 잃곤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한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남성 동료들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창녀와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진정으로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래서인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팻에게 끌린다.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는 사람들 틈에서 팻이 자신이 입은 상처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강제 고립을 당한다는 점이다. 정신병원에서 8개월 간 치료받고 퇴원했으나 여전히 경찰의 감시를 받고 이상한 행동을 보일 때는 경찰의 제재를 받는다. 강압적으로 행동을 제지하는 방법은 의학상 치료를 위해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상처를 보듬지 못한다. 팻에게 필요한 건 약과 진료, 그리고 그의 행동을 억압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부터 극복할 수 있다는 말처럼, 그에게 필요한 건 과거의 아내 리키를 잊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일 것이다.

타인과 공감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받는 일은 무엇보다 강한 마음의 치유책이다. 팻과 티파니는 함께 댄스대회를 준비하는데 잦은 만남 속에서 둘이 나누는 교감은 상대방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도록 돕는다. 둘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 애틋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남녀 사이의 단순한 호감을 넘어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정리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새로운 관계에서 얻으며 둘은 잊었던 웃음을 되찾아간다.

영화 초반 주인공들이 겪는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사람과 교류하는 데 서툰 이들이 많아지는 요즘 모습과 겹쳐진다. 영화에서는 상실감에 비롯한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이 겪는 고단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밥벌이가 힘겨워 청년들은 취업에 목을 매고 취업을 하고 나서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근근이 직장생활을 버틴다. 가까스로 결혼을 한 뒤에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안간힘을 쓴다.

갓 20살로 접어든 대학생들조차 자기가 짊어져야 하는 이런 분위기에 짓눌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을 뒷전으로 미룬다. 홀로 밥 먹는 '혼밥'이 유행하고 연애가 부담돼 '썸'만 타는 이들이 늘어나며 친구 관계도 적당히 SNS나 카톡으로 유지한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의 70% 이상이 혼자 있는 게 편해서 ‘혼밥’을 한다고 답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오히려 자기계발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발상과 맞물려 다른 사람과 깊이 교류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 됐다.

함께보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지면 자신이 가진 상처를 사람과 교감하며 치유하는 이들은 줄어든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든, 교감이 사라지는 사회에서 생기는 외로움이든, 자기 감정을 홀로 감당하다가 견디지 못해 생기는 여러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한다. 지난달 21일 GOP에서 총기를 난사한 임 병장은 과거에도 종종 발생했던 총기 난사사건 피의자들처럼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관심병사’로 알려졌다.

재발방지를 위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다르게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삶을 포기하는 과격한 행동으로 드러나는 개인의 문제가 자주 노출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무덤덤해진다. 개인의 성격을 질책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혼자서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립에 익숙한 사람이 ‘쿨’한 사람으로 불리는 분위기가 자리잡으며 외로움에 적응해가는 스스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말고도 주인공이 상상 속에서 만든 친구와 이별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페이퍼맨>, 주인공과 컴퓨터가 사랑에 빠지는 <그녀> 등 외로워지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영화들이 연이어 국내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타인과 맺는 관계’를 발판 삼아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마지막 장면들이 자꾸만 머리 속에서 재생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 또한 관계 맺기를 갈망하면서도 그 일에 서투르기 때문이 아닐까? 남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 내 성격 탓만은 아닐 터이다. 고립과 소외를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세태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교감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만나자고 말하기에는 머뭇거려지니 영화 속 팻과 티파니를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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