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최선우 기자

▲ 최선우 기자
여자들의 대화에 가끔 등장하는 ‘나쁜 남자 중독’이라는 병이 있다. 이 병에 걸린 여자들은 연인이 남성적 매력을 무기로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상처를 주는데도 좀처럼 헤어지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를 더 이상 못 보게 되는 변화가 두려워서, 혹은 그 사람 외엔 대안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냉철한 선택을 미루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에선 이를 ‘경로의존성’으로 설명한다. 폴 데이비드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사람들은 한 번 일정한 습관과 방식에 의존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해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부산의 고리1호기 등 설계수명을 다한 노후원전을 계속 가동시키자는 주장도 경로의존성에 갇힌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수명연장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본 후쿠시마 사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원전은 안전하며, 그만큼 싸고 친환경적인 에너지가 없으니 개보수를 해서 더 쓰는 게 맞다’고 말한다. 원전만큼 값싼 전력을 대량으로 공급할 다른 대안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이미 설계수명 30년에서 10년을 연장한 고리 1호기의 추가 연장 가동을 검토하고 있고, 30년 설계수명을 넘긴 경주의 월성1호기도 10년 더 돌리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한여름과 겨울 등 성수기에 전력이 끊기는 위기를 맞지 않으려면 새 원전을 더 짓는 계획과 별도로 기존 원전의 부품을 교체하고 정비해서 최대한 연장 가동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안전은 결코 경제적인 잣대로만 재단할 수 없는 중대한 가치다. 원전사고의 확률이 이론적으로 아무리 낮아도 일단 사고가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생생히 목격했다. 항공기 추락, 폭탄 테러 등 다른 대형 참사는 해당 세대, 해당 지역으로 그 비극이 한정될 수 있지만 원전사고는 한번 났다하면 광범위한 지역으로, 수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후유증이 이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방사능에 피폭되는 경우 인체는 사망, 난치병, 유전적 이상 등의 치명적 피해를 입고 그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며 피해는 공간적, 시간적으로 확대된다.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 후유증은 기형아 출산, 갑상선암 등 불치병, 생태계 교란 등으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는 원전 오염수의 바다 유출 등이 아직 통제되지 못하는 ‘현재진행형’이어서 일본과 주변국이 앞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 고리원전 1호기. ⓒ MBC 뉴스투데이 화면 갈무리

원전의 설계수명은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노후원전은 설계 당시 30년으로 정했던 수명이 지났다는 사실 그 자체로 위험하다. 아무리 새 부품으로 교체하고 스트레스 테스트를 거친다고 해도 원전의 몸통인 원자로 자체가 낡고 약해졌기 때문에 사고위험성이 높다는 게 환경단체의 주장이다. 지진해일이 덮친 후쿠시마 원전에는 10기의 원자로가 있었는데, 이 중 가동 30년이 넘은 노후원전 1,2,3,4호기에서 ‘나이 순서대로’ 폭발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낡은 원전 고리1호기의 30킬로미터(km) 반경에 300만~400만 인구가 밀집해 있는 우리 현실은 사고가 났다하면 후쿠시마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재앙이 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로 이어진다. 

원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늘 원전의 경제성을 강조하지만 ‘숨어 있는 비용까지 감안하면 결코 경제적인 에너지원이 아니다’는 반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수원은 원전의 발전단가가 1킬로와트시(kwh)당 39~50원대로 석탄, 액화천연가스(LNG), 석유, 태양광 등 다른 에너지원 발전단가의 몇분의 1, 혹은 몇십분의 1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일부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이 계산에 노후원전 폐로 비용, 사용후 핵폐기물 처리 비용, 사고발생시 수습 비용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2009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는 1kwh당 원전의 발전단가를 114.8원으로 평가하면서 원전이 석탄, 가스발전보다 비싸다고 지적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비슷한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우리도 모든 변수와 비용을 정확하게 따져서 원전이 가장 경제적인 에너지라는 주장 자체를 제대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설계수명을 다한 노후원전을 폐쇄하는 것은 원전에 대한 경로의존성을 끊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원전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일부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가장 경제적’이라는 매력과 ‘다른 대안이 없다’는 변명을 내세우며 원전을 더욱 늘려가는 길을 걸어왔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 유럽 주요국들이 ‘탈원전’을 본격화하는 와중에도 이명박 정부는 삼척, 영덕을 새 원전후보지로 지정했다. 집권 전에는 안전을 중시해 원전 정책을 수정할 것처럼 말하던 박근혜 대통령도 집권 후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거의 그대로 따라갔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원전은 위험하며  그리 경제적이지도 않다는 것, 독일 등이 보여주듯 신재생에너지라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노후원전 폐로를 통해 ‘단계적 탈원전’의 새 길을 나설 때가 됐다. 

미국의 경제학자 토마스 셸링은 "우리는 계획을 할 때 낯선 것을 가능성이 낮다고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익숙하지만 위험한 원전을 냉정하게 재평가하고, 아직은 낯설지만 ‘생명을 위협하지 않고, 탄소배출 없이 깨끗하며, 에너지자립을 가능하게 해 주는’ 신재생에너지 투자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인생을 안 망치려면 ‘나쁜 남자’를 정리해야 하듯, 국가적 재앙을 피하려면 원전 중심 에너지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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