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장경혜 기자

▲ 장경혜 기자

장률 영화의 등장인물은 끊임없이 걷는다. 목숨 걸고 탈북에 성공하지만 국경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강박감에 중국을 건너 몽골까지 다다른 '경계'의 주인공 최순희처럼. 일상이 된 타국의 포격과 공격이 만든 상흔을 극복하지 못한 까닭이다. 가까스로 경계를 벗어났음에도 내면에 자리한 불안이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멈춰서도 될 곳에서 다시 정처 없이 걷는 사람들. 관객은 안전한 그곳에서조차 좀처럼 머물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국경 부근의 삶이 얼마나 가학적인지 유추할 뿐이다. 

사람은 이동하고 역사는 흐르지만 지정학적 위치는 그곳에서 정지해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맞닿은 한반도는 지리적 요충지이며, 패권세력 사이 긴장이 더 팽팽한 곳이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중국은 미국 견제를 위해 한반도에 안보 자원과 경제 안정을 지원한다. 한국은 그 속에서 양다리 외교로 처신하며 국력을 다져왔으나 두 세력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면서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랐다. 미국은 '아시아 회귀' 전략을 내세워 동아시아의 세력 주도권을 욕심내며, 중국도 '화평굴기'라는 비전을 내걸고 G2의 영향력을 확장 중이다. 이와 같은 패권 전환기, 동북아의 균형이 깨진다면 세력 충돌의 접점에 놓인 한반도는 긴장감이 고조돼 역내 안정과 평화를 꾀할 수 없게 된다. 

한반도는 세력이 맞부딪치는 경계선이 아니라 두 세력을 조정하는 완충 지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립적 역량을 길러 스스로가 하나의 세력이 되는 것이 답이다. 결국 남북 교류를 통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달성해야 가능한 이야기다. 과거보다 더욱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국제정세 안에서 외교적 비책이나 전략은 한계가 있다. 통일을 통해 전체 한반도의 국력을 한 층 끌어올릴 때 자국 안위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고 늘어난 시장과 노동력으로 경제적 이익도 역내에서 충분히 벌충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강대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중재국의 역할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갈등과 영토 분쟁이 만연한 동북아에 평화와 화합의 선도자로 한반도의 이미지가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라도 박근혜 정부는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 외국에서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하며 국제사회의 동의를 구한다고 해서 북한이 한국의 대북정책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통일 대박론'을 내세우며 통일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남북관계를 경색시킨 이명박 정부와 다를 바 없다. 천안함 사과와 비핵화를 전제한 5.24 조처 완화에서 한 발짝도 진전하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행보는 오히려 흡수통일을 전제한 통일계획으로 비춰져 김정은 정권의 도발을 자극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결과물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은 이벤트이다. 이를 제안해서 남북 협력의 정신을 환기하고 북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해주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통일에 냉소적인 젊은 세대를 설득하기 위해 통일의 경제 효용성을 내세우고, 한반도와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사회의 동조를 구하면서 정작 협상 당사자인 북한과는 대화를 꺼리고 있다. 종북 딱지를 내세워 국민의 불안을 이용하는 정치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강대국의 패권다툼은 시간이 갈수록 구체화하는 가운데 지리적으로 경계에 놓인 한반도의 기초체력은 각종 사회갈등이 빚은 분열로 허약해지고 있다. 영원히 경계선으로 머물지 않으려면 보다 나은 미래를 계획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