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요즘 시대에 가장 믿지 못할 것이 방송과 신문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친구인 기자가 말한 ‘요즘 시대’는 30년이 지났지만 마치 지금 언론상황을 말하는 듯하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보도를 제대로 못할망정 독재에 비분강개하는 기자가 꽤 있었고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상황에 순종하는 기자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이다. 대통령 기자회견을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보도된 것은 폭압정치의 틈새를 뚫고 나오려는 기자들의 의기가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 신문은 지금 거대한 선거비리가 불거졌는데도 축소보도에 급급하는가 하면 대통령 기자회견이라는 기회도 그냥 날려버렸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국민에게 현안을 설명하고 반대자와 소통하는 정치행위인데, 설명도 소통도 없었고 공안통치 말고는 정치도 사라졌다. 나라가 시끄러운 국가기관 선거개입에 대해서는 재판 중이라는 이유로 혼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종북몰이를 하던 공안사건들과 전연 딴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불법으로 떼쓰면 적당히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건 소통이 아니다”라며 자신은 현장 방문과 청와대 초청 등으로 소통을 잘해왔다고 말했다. 국민 다수가 공공부문 사영화에 반대하고 야당을 비롯한 상당수 국민은 철도파업도 지지했는데 그들은 졸지에 ‘떼나 쓰는’ 국민과 정당이 되고 말았다.

소통은 원래 반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도 그것을 수렴한다는 점에서 독재나 공산주의와 다르다. 야당은 영어로 ‘반대당’(Opposition Party)이라 부를 만큼 반대가 존재 목적이다. 선거의 공정성과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고 공기업의 사영화를 막으려는 노력을 ‘국론분열’이니 ‘소모적 논쟁’이라 말한다면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이니 공무를 맡아서는 안된다.

현장 방문과 청와대 초청도 소통에 도움이 되려면 반대자들을 만나야 한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여당과 야당의 청와대 초청건수가 12 대 2라고 한다. 지난달 19일에는 새누리당 당직자 600명과 오찬을, 지도부와 만찬을 하며 대선 승리를 자축했고, 1월7일에는 또 새누리당 국회의원과 원외당협위원장 240명을 청와대로 초청했는데, ‘당내 행사’에 왜 국민세금을 쓰는지 모르겠다.

프랑스 혁명 전 루이 왕조 때 백성들이야 멀건 귀리죽을 마시든 굶든 신하들만을 초청해 벌인 궁정만찬을 생각나게 한다. ‘궁정만찬’에서 분위기를 깨가며 쓴소리를 할 용사가 있을까? 필경 아부와 반대자 규탄의 경연장이 될 터이다.

케네디 대통령과 반핵운동가 라이너스 폴링의 백악관 만남은 어땠나? 노벨 화학상을 받은 폴링은 반핵운동을 펴다가 반국가사범으로 찍혀 연방수사국의 감시와 수사를 받은 인물이다. 미국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한 백악관 만찬이 있던 날도 그는 백악관 앞에서 온 종일 반핵시위를 했다. 만찬 시간이 되자 턱시도로 갈아입고 들어간 그에게 케네디가 말했다. “당신이 만찬에 참석한 데 경의를 표합니다.” 쓴소리를 멈추지 않은 폴링은 그해 겨울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케네디 암살 뒤 대통령이 된 존슨은 ‘위대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복지를 대폭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텍사스 출신인 그는 같은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이 몰려와 법안을 저지하려고 압력을 가하자 대답했다. “나는 국민의 대통령이란 말이오.”

성공한 대통령은 반대자의 쓴소리를 수렴하고 지지자의 떼쓰기를 뿌리치는데, 박 대통령은 기득권을 지키려고 떼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쓴소리를 멀리한다. 그는 사영화 반대 목소리 등을 ‘잘못된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언비어 중에는 물론 잘못된 것도 있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도 유언비어가 난무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추기경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글이 불법 출판물 <리벨레>에 실리기도 했는데 허가된 신문보다 더 신뢰를 받았다.

 

 

▲ 루이 왕조 궁정만찬과 케네디 백악관만찬은 무엇이 달랐나
 성공한 대통령은 반대자 쓴소리 수렴하고 지지자 떼쓰기 뿌리쳐
 청와대 기자들 애완견 구실만 할 바엔…

박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시대에 이어 자신의 치세에 왜 ‘유언비어’가 난무하는지 살펴야 한다. 왕조시대 임금은 가뭄 드는 것조차 자신 탓으로 돌렸다. 왕이 실정을 하면 갈아치워야 한다고 주장한 맹자는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않은 이가 없다”며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수많은 대선공약을 파기하고도 진솔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러면 공약집이야말로 ‘유언비어 모음집’이 아닌가?

현재로서는 ‘철도 민영화 안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진심일 수 있다. 그러나 1년도 안돼 주요 대선공약들을 거의 다 파기한 박근혜 정권의 약속을 국민들은 믿지 않는다. 시장주의자들의 신앙이나 다름없는 사영화 행진이 과연 유언비어로 끝날까? 새누리당 홍보책자 <늑대가 나타났다>는 ‘KTX 자회사 민영화는 괴담’이라며 반대자들을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에 비유했다.

이솝우화의 교훈은 ‘거짓말하면 안된다’는 거지만, 사실로 드러난 건 결국 늑대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철도 역시 적자가 나면 공익성은 뒷전으로 밀리고 적자노선부터 팔아치울 가능성이 있다. 현오석 부총리는 “공기업이 못하면 민간이 들어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속내를 드러냈고, KTX 분리가 결국 민영화를 겨냥하고 있다는 코레일 내부보고서도 폭로됐다.

대자보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을 대통령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언론의 책임도 상당하다. 지난해 11월8일 ‘청와대 기자들은 죽었다, 민주주의와 함께’라는 제목의 시민편집인 칼럼에서 기자회견 한번 하지 않은 대통령과 청와대 기자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마저 후회스럽다. 안 하는 것만도 못한 기자회견을 지켜보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임기 내내 하지 말 것을 당부 드린다.

질의응답의 내용과 순서까지 각본으로 짜놓았으면서 홍보수석이 기자들 손을 들게 한 뒤 지명을 하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국민을 선전 대상으로만 여기는 박근혜 정부 연출의 희극인 동시에 한국 언론의 비극이었다. 한 보수신문은 드라마 주인공인 박 대통령의 복장에 주목해 “분홍색 재킷에는 선이 분명히 살아있었다”며 “선을 통해 단호함과 엄격함도 함께 느끼게 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몇 안되는 진보매체들은 ‘사다리 타기’에서 탈락해 질문 기회마저 없었다고 한다. 수백명 기자가 출입하는 청와대이니 질문 기회를 못 잡을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우리 언론지형도가 기울어 있음을 말해준다. 기자회견을 통해 내가 새로 알게 된 것은 시대착오적 경제3개년 계획과 청와대에서 키우는 강아지 이름뿐이다.

대부분 청와대 기자들은 감동도 긴장도 없는 80분 드라마의 충직한 엑스트라였다. 인터뷰나 기자회견은 원래 말꼬리를 잡고 재질문을 해야 의미가 있는 보도방식이다. 그러지 않으면 당사자의 해명과 선전으로 끝나게 돼 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을 때 국민은 정치인의 본모습을 선명하게 보게 된다. 한 종편방송 여기자는 기자실을 방문한 대통령에게 “너무 안고 싶었어요”라며 품에 안겼다. 박 대통령에게는 청와대 기자도 감시견이 아니라 애완견이다.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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