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닉슨 대통령이 각료회의실에 쳐들어온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당신네들이 들어올 때 우리가 ‘공해’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미국 기자들이 탄 헬리콥터가 산디니스타 군의 사격을 받고 불시착했을 때 레이건 대통령이 말했다. “그들 중에 좋은 이도 있지.”

백악관 최장기 출입기자 헬렌 토머스의 자서전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에 소개된 일화들이다. 언론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독재자를 빼고 언론을 좋아하는 권력자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들은 재임기간에 언론의 감시를 받는 것을 의무라 여겨 언론을 완전히 피하지는 않는다. 1993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조지 부시는 “나는 백악관에 있을 때 ‘언론의 자유’를 믿었지만 지금은 ‘언론으로부터 자유’를 믿는다”고 토로했다.

특히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언론을 기피하면 제도 자체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다. 정치와 행정이 비밀주의에 의존하면서 언론의 견제를 받지 않으면 독재와 비효율로 치닫기 쉽다. 내각제에서는 모든 현안을 의회에서 토론하니 언론은 중계만 하더라도 국민들이 정치를 감시하고 참여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영국에서는 매주 수요일 정오부터 30분간 총리가 야당 당수와 토론을 벌이고, BBC가 생중계한다.

미국의 성공한 대통령들은 언론을 싫어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민에게 다가서려 했다. 라디오 ‘노변정담’으로 유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기자회견도 정기적으로 한 첫 대통령이고, 케네디는 기자회견 생방송을 허용한 첫 대통령이다. 걸프전을 치른 조지 부시는 4년간 200회 가까운 기자회견을 했으니 매주 한 번꼴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래 국내 언론과 한 번도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진기록을 갖고 있다. 대선 후보 시절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긴급 기자회견을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집권 후에도 외국 언론과 꽤 여러 번 인터뷰한 것에 견주면 국내 언론 홀대가 아주 심하다. 9월26일 복지공약 후퇴를 해명할 때도 기자들을 대기시켰다가 국무회의장에 입장하게 해 5분 정도 발표문을 읽은 게 고작이었다. 물론 질문은 받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언론을 국정 감시자가 아니라 자신의 동정을 보도하고 정책을 선전하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친의 언론관을 닮았다. 총리까지 그들을 닮아 국정원 선거개입과 관련해 첫 대국민담화문을 읽은 뒤 아무런 질문을 받지 않고 퇴장했다.

박 대통령은 브리핑룸 대신 재래시장을 자주 찾는다. 골치 아픈 질문 대신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일까? 민생을 위해 바쁜 시간을 할애하는 대통령상을 부각시키면 지지율도 올라간다. 그러나 대통령의 ‘민생탐방’만큼 이미지를 쉽게 조작할 수 있는 이벤트도 없다. 사전에 구청이나 지역구 의원 등을 통해 여당 지지 상인들을 파악해 그 가게에 들러 물건을 사는 게 보통이다.

정부에 불만이 있거나 야당 성향 상인들은 만나지 않도록 동선을 짜니 진짜 민심을 수렴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사 들고 독거 노인의 방으로 막 들어서는 사진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는데, 계획된 방문이 아니라면 사진기자가 쪽방 안에서 대기하다가 사진을 찍지는 못했을 터이다.

이번 유럽순방에서도 똑같은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외국 언론과 사전 인터뷰를 했을 뿐 한국 기자들은 그의 동정을 보도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유럽까지 가서 보도하는 내용이 거의 같다면 비싼 취재경비를 부담하며 기자단이 떼로 몰려갈 이유가 뭔가?

내용에 차이가 있다면 누가 더 찬양 보도를 화끈하게 하느냐에 있는 듯하다. 박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비가 그치고 햇빛이 쨍쨍 비친다’거나, 공장을 방문하면 ‘창조경제 세일즈’라고 써댄다. 미술관을 방문하면 ‘문화외교’요, 옷을 갈아입으면 ‘패션외교’라는 찬사가 이어진다. 지난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박 대통령의 패션외교에 전 세계가 반했다’더니 프랑스와 영국 사람들은 뒤늦게 반한 건가?

불어로 연설하자 종편채널에서는 ‘박 대통령은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하는지’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사실 줏대 있는 나라 정상들은 제 나라말로 연설한다.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면서 남이 써준 영어·중국어·불어 연설문을 읽고 또 읽으며 발음 연습을 할 대통령을 상상하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찬사가 이어지니 대통령으로서는 ‘힐링 여행’이 될지도 모르지만.

황금마차와 버킹엄궁 국빈만찬이라는 ‘지상 최고의 의전’에 감동하는데 외교는 원래 의전으로 혼을 빼놓고 실리를 챙기는 것 아니던가? 돈 안 드는 말로 주고받는 덕담에 취하면 이명박 대통령처럼 된다. “세계가 나를 녹색성장의 아버지라고 한다”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경제효과만도 24조원이라 했는데, 제 돈 들여 국제대회와 국제회의를 자주 열기로 유명한 한국의 경제 형편이 안 펴지는 건 무슨 영문인가? 핵안보정상회의 때 발표한 ‘서울 코뮈니케’를 실천하고 있는 정상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출국하면서 다들 잊어버렸을 것이다.

 

 

▲ 기자회견 한번 안 한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제에 치명적 타격

▲ 싫어하는 질문 못하고 홍보에만 앞장선다면
    청와대 기자들도 ‘공범’

▲ 데이비드 프로스트, 헬렌 토머스 신화
    왜 한국에는 그런 기자가 없나

이번에도 우리 대통령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내줬는지 아리송하다. 외교 성과를 깎아내리자는 게 아니라 얻은 것만 대서특필하는 보도행태를 문제 삼는 것이다. ‘르몽드’는 ‘박 대통령이 한국의 공공부문 조달시장 등을 외국기업에 개방한다고 연설해 프랑스 기업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보도했는데, 국내 언론은 눈에 띄게 보도한 데가 없었다.

늘 그랬듯이 투자협력 양해각서는 대통령이 가지 않더라도 기업들이 이미 성사시켜 놓은 것을 때맞춰 체결하는 ‘진상품’일 경우가 많다. 프랑스·영국 언론들을 검색해보았더니 기사 수도 아주 적었지만 우리 언론처럼 들뜬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이 처한 국내 정치상황과 프랑스·영국 교민들의 국정원 규탄 시위를 곁들여 보도했다.

국내에서는 국가기관 선거개입이 계속 폭로되는 가운데 초유의 정당 해산심판이 청구되고 지난 대통령선거 후보가 소환됐다. 대선에서 자신과 맞섰던 유력 후보가 모두 수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청와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침묵한다.

대통령 ‘책임제’가 대통령 ‘무책임제’처럼 운용되고 있는 현실은 대통령 탓이 크지만 언론에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청와대 홍보담당관처럼 처신하는 상당수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책임은 더욱 엄중하다.

몇몇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취재했더니 오전 7시30분과 오후 5시30분에 이정현 홍보수석이 ‘브리핑’이라는 것을 하지만 보도되길 원하는 것만 얘기할 뿐 건질 게 별로 없다는 반응이었다. 조금만 ‘까칠한’ 질문을 하면 이 수석은 10초쯤 입을 꾹 다물어 버려 기자들이 알아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대통령은 아예 만날 수도 없고 홍보수석에게도 잘못 보일까 전전긍긍하니 대통령 미화와 성과 위주로 보도가 된다.

민감한 얘기를 하다가도 뒤늦게 ‘비보도’(off the record) 요청을 하거나 중요 사안은 ‘엠바고’(embargo)를 걸어 특정 시점까지 보도를 통제하기도 한다. 대통령이 보안만 중시하니 정치와 정책에 전문가 견해를 비롯한 여론이 반영될 여지는 줄어들고 정책 실패 가능성은 커진다. 때로는 비보도 요청이 필요하긴 하지만 주요 언론사 기자들 입김이 센 기자단에서 청와대의 협조요청을 깬 기자들을 장기간 출입정지하는 것은 자승자박 의미도 있다.

청와대 기자실의 ‘평화’는 국민의 알 권리 침해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기자들이 단합해 최고권력자의 ‘보도관제’에 저항하면서 정기 또는 수시로 기자회견을 요청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끈질기게 던져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제 아래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관건이다.

9월에 숨진 데이비드 프로스트는 BBC에서 일하면서 영국 총리 6명과 미국 대통령 7명을 까다롭게 인터뷰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뒤 닉슨을 물고 늘어져 사과를 받아낸 ‘세기의 인터뷰’로 이름을 떨쳤다.

7월에 숨진 헬렌 토머스는 미국 대통령 10명에게 모두 껄끄러운 질문을 던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3년간 기자회견장에 초청하지 않다가 출입금지를 푼 첫날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왜 전쟁을 원했는가? 당신은 석유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무슨 이유인가?”

토머스는 기자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당신이 사랑받고 싶다면 이 직업에 뛰어들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는 “기자들이 권력자 앞에서는 무례해도 된다”고 했다. “기자는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권력자에 대해 경외심이 생기면 기자는 끝장이다. 150명이 넘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각 언론사에서 파견한 엘리트들이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려면, 아니, 최소한 ‘군주제’를 원하지 않는다면, 청와대 기자실의 ‘침묵하는 전통’을 깨야 한다. 영국과 미국 언론은 민주주의를 누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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