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지난해 말 한글날이 쉬는 날로 다시 정해졌을 때 한글이 제 대접을 받는 계기가 되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눈에 띄는 행사도 거의 없어, 대통령이 참석해 요란하게 치른 ‘국군의 날’과 더욱 견주어졌다. 사실 한글을 가꾸고 한글 사용을 부추기는 일은 말과 글로 사업을 하는 언론이 가장 힘차게 추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스스로 한글신문이라 일컫는 신문들조차 작은 칼럼 등을 내보냈을 뿐 한글날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일보가 ‘한글이 아프다’는 기획기사를 연재했고 동아일보는 전면 기획특집을 내보냈다.  

더 중요한 것은 여느 때에 언론이 한글을 제대로 부려 쓰는 것이다. 대중은 언론이 쓰는 말과 글을 표준으로 생각하고 따라 하기 마련이다. 영국 더타임스와 BBC, 프랑스 르몽드 등 세계의 권위있는 언론들은 자국어를 가꾸고 퍼뜨리는 ‘주역’이었다. 그러나 우리 언론, 특히 신문은 한글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욕을 먹어도 싸다.

지난 7월 시민편집인이 되어 경향신문을 샅샅이 읽으면서 다행스러웠던 것은 교열부 노력 덕분인지 단순한 오·탈자가 아주 많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문제는 기자와 필진이 한자말, 일본어, 영어 따위 표현법에 너무나 심하게 중독돼 있다는 거였다. 

너무 많은 사례가 ‘모니터링 일지’에 적혀, 이번에는 한자말 중독 증세만 진단해보고, 일본어와 영어 중독 문제는 다음 기회에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 우리 말과 글에 스며든 비민주적 요소 등 언어의 공공성 문제는 따로 따져볼 계획이다.

가장 애석한 것은 한자말이 우리말을 계속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양인의 말과 신문의 글은 격식을 지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글은 물론이고 말에서도 한자투성이 문어체를 남발하게 만든다. 노무현 대통령이 구설에 오른 것도 ‘문어체 공화국’에서 구어를 막 쓴 탓이 아닐까? 문어체는 미래의 독자인 젊은 층에게 고리타분하게 보여 신문이 더욱 외면받을 수 있다.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지식인들은 굳이 한자말에 접미사 ‘-하다’를 붙여 어색한 말을 만들어낸다. 경향신문에서 수없이 발견되는 ‘차치하고라도’(7일, 사설 등)는 ‘그만두고라도’보다 의미 전달에서 뒤진다. ‘위치해 있다’(8일, ‘위례신도시~’ 분양 기사 등)는 그냥 ‘있다’로 넉넉하다. 

‘~에 기초한’보다는 ‘~에 바탕을 둔’이란 말이 정감 있고, ‘달(達)하다’는 ‘이르다’가 제격이다. 심지어 밥 먹고 일하고 쉬고 잠자는 일상생활도 글에서는 ‘식사하고’ ‘근로하고’ ‘휴식하고’ ‘취침하는’ 걸로 바뀌는 게 보통이다. 

한자말로는 의미 전달이 충분하지 않다 여겨 우리말을 겹말로 덧붙이기도 한다. ‘역전앞’ ‘처갓집’ 같은 이상한 말이 그래서 생겨난다. ‘차 타다’를 ‘승차하다’로 바꿔 쓰니 ‘버스 승차 거부 운동’(5일, ‘새 책’) 같은 말을 무심코 쓰게 된다. ‘버스 타기 거부 운동’이라 부르면 어쩐지 동조자가 늘어날 것 같은데 중복 표현을 그대로 쓴다. ‘이 기간 동안’(16일, ‘포털, 게시물 차단 남발~’), ‘먼저 선취점 올리네’(9일 인터넷판, ‘경향포토’)는 완전히 중복이다. 

한자말을 넣어 길게 쓰는 것도 잘못 든 버릇이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는 ‘그런데도’로 줄일 수 있지만 이달 들어 11번이나 눈에 띄었다. 또 ‘가능성도 있다’고 하면 될 것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10일, ‘외교관 자녀 130명 복수국적~’)는 식으로 빙빙 돌려 쓴다. 

 

▲ 한자말에 밀려나는 아름다운 우리말들
 한국 언론은 한글 망치는 ‘주범’인가
 우리말 인용구 앞에‘속된 말로’ ‘시쳇말로’ 깎아내리는 버릇까지

‘각 지역별로 인구수’(13일 인터넷판, ‘와이파이 존 어디가 많을까’)는 그 짧은 문구에 두 번이나 말이 중복되는데 ‘지역별 인구’라 하면 충분하다. 인구는 원래 ‘사람 수’를 뜻하는 말이니까. ‘혜화동 성당 옥상 위에’(주간경향 1037호, ‘신간 탐색’)는 옥상이 이미 ‘지붕 위’라는 뜻이니 그냥 ‘~옥상에’로 써야겠다. 

어려운 한자말도 가능하면 피했으면 한다. ‘박 대통령도 오불관언의 태도로 방관하지 말고’(8월6일, 사설)는 ‘박 대통령도 나 몰라라 하지 말고’로 쓰면 어떨까? ‘XX천국’은 너무 많다. ‘전남의 어획량은 2008년 5477t으로 ‘낙지천국’(14일, ‘귀하신 몸, 낙지~’)은 ‘낙지천지’로 쓰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너무나 많이 포획됐으니 낙지에게는 ‘지옥’이었을 터이다. 

기자들의 글쓰기 습성 가운데 대표적인 오류는 자동사를 굳이 피동형으로 만들어 ‘일반화되다’ ‘구체화되다’ 식으로 쓰는 것이다. ‘화’란 어미 자체가 ‘될 화(化)’ 자이니 ‘되다’란 말이 겹친다. 최현배 선생이 <우리 말본>에서 개탄했던 것처럼, 툭하면 ‘시키다’란 어미를 붙이는 것도 악습이다. ‘자극한다’를 괜히 ‘자극시킨다’ 식으로 쓴다. 

‘일반고 역량강화안 공청회~’(9월25일) 기사에는 ‘슬럼화되고’ ‘슬럼화시킨다’ ‘고착화시킬’ 등이 계속 등장한다. 심지어 9월27일자 ‘시민편집인 시각’에도 ‘빨간옷을 입으면 투자가 활성화된다니 대통령이 영험있는 무당이라도 된단 말인가’로 돼 있는데, 실은 ‘활성화한다니’로 원고를 보냈는데 누군가 바꿔놓았다. 

한자말 따위 외래어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순 우리말을 쓰는 데 더 과감해야 한다. 우리말은 처음에는 어색해 보여도 쓰다 보면 의미론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동아리, 새내기, 도우미, 걸림돌, 머리기사 같은 좋은 말들이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그렇다고 의미 전달이 1차 목표인 신문 글쓰기에서 쓰는 이만 아는 순 우리말을 남발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칼럼에서 일상의 우리말을 인용할 때 굳이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치인 출신의 진영은 속된 말로 ‘더러워서 못하겠다’고 가출이라도 감행했지만’(4일, ‘진영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나’)이라 썼는데, ‘더러워서 못하겠다’는 말에 꼭 ‘속된 말’이라는 낙인을 찍을 필요가 있을까? 

‘시쳇말로 박 대통령은 요즘 잘 나가고 있다’(8월20일, ‘경향의 눈’)는 표현도 거슬린다. ‘시쳇말’의 뜻은 ‘시체(時體)말’, 곧 ‘그 시대에 유행하는 말’이라는 뜻이지만, 억지로 만든 말일 뿐 아니라 어감도 좋지 않다. 한자말에 밀려 한글, 특히 항간에서 쓰는 구어들이 비속어로 취급되는 풍경이 애처롭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을 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유교·왕정시대에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말을 살려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한편으로 백여 년간 우리말이 얼마나 외래어에 중독되고 오염됐는지 놀란다. 한국 신문은 독립신문에서 배워야 한다.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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