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슬비 기자

▲ 이슬비 기자
양계장의 닭은 24시간 켜진 전등 아래 숨 막히도록 빽빽이 들어앉아 있다. 목적은 오직 ‘알’ 증산이다. 빛은 닭의 산란과 직결된다. 빛이 닭의 망막을 통해 시신경을 자극하고, 뇌하수체 전엽의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면, 닭은 더 많은 알을 낳는다. 이런 닭의 생리를 간파한 양계업자는 닭을 ‘알 낳는 기계’로 전락시켰다.

아름답다는 서울의 야경을 보며, 인간의 삶 또한 닭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24시간 불 꺼지지 않는 빌딩, 아파트, 학교는 거대한 양계장을 연상케 한다. 양계장 속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피로와 스트레스에 찌들면서도 좀 더 좋은 ‘알’을 많이 낳으려 애쓴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피로에 지친 몸부림을 전등은 무심하게 조명한다.

양계장과 우리 사회에 다른 점이 있다면 전등을 켜는 주체다. 양계장의 전등은 양계업자가 켜지만, 우리 전등은 스스로 켠다.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우리는 밤낮없이 불을 켠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스스로를 마모시킨다. 지배와 강제를 통한 타자 착취가 아닌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 즉 스스로를 ‘알 낳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것은 인류에게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던 생활패턴이 깨지면서 세상은 온통 과로사회로 바뀌었다. 전기와 함께 발전한 자본주의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풍요로운 삶을 보장할 거라는 환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경제발전 이면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자기 착취의 성과사회다. 결국 우리는 우울한 인간인 동시에 언제까지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쳐버리는 낙오자일 뿐이다.

현대인이 우울한 것은 ‘긍정성의 과잉’ 때문이라고 철학자 한병철은 말했다. 그는 저서 <피로사회>에서 ‘하면 된다’는 긍정성 과잉이 무언가 하면서도 늘 뒤처지고 허탈한 느낌을 만든다고 했다.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긍정의 배신>에서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당신의 긍정적 사고야말로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대변한다’고 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현대인에게 ‘긍정성’을 부정하는 이들의 외침은, 너무나 과로하고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사회에 크게 울리는 경종일 성싶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의 힘’이 아니라 약간의 ‘게으름’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하루쯤은 늦잠을 자거나 느긋하게 식사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것, 때로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이야말로 새로운 몰입의 에너지로 분출될 수 있을 것이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 1위인 나라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이유는 일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는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일 터이다. 인간의 삶이 평생 알만 낳다가 폐계가 되고 마는 양계장의 닭을 닮아간다면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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