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진희정 기자

▲ 진희정 기자
‘애리조나주 투싼 쇼핑센터 앞 총격사건 발생, 지역민들과 행사중이던 여성 하원의원 관자놀이에 총상’

ANC 뉴스룸은 나가던 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를 준비한다. 앵커가 총기사고 소식을 전하고 기자들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사이, 뉴스룸 내부통신망으로 하원의원이 사망했다는 통신사 발 단신이 전해진다. FOX CNN MSNBC 등 주요 방송들이 앞다퉈 사망 소식을 전한다. ANC 경영진도 사망기사(obituary)를 내보내라고 닦달하지만 뉴스룸은 단호하다. “사망선고는 의사가 하는 것이지, 뉴스가 하는 게 아니다.”

2011년 1월 투싼에서 발생한 실제 총격사건을 한 회 에피소드로 차용한 미국드라마 <뉴스룸>의 한 부분이다. 드라마 속 방송사는 결국 하원의원이 살아있음을 공식 확인하면서 유일하게 오보를 면하지만, 실제 투싼 총기사건을 다룬 당시 미국 언론은 기퍼즈 의원을 포함한 부상자 18명에게 의사보다 먼저 ‘사망 진단’을 내린 꼴이 됐다.

돌발하는 재앙 앞에 언론은 쉽게 이성을 잃는다. 아시아나 항공기 착륙사고를 두고 “사망자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어서 다행”이라던 한 종편방송 보도부터,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 신문사가 헤드라인으로 뽑은 ‘일본 침몰’까지, 이성을 잃어버린 보도는 그 자체가 재난이다. 언론이 비극의 스펙터클에 치중할수록 인간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과장보도가 난무한다.

눈앞에 펼쳐진 지옥을 보고도 언론이 테러범과 특종을 거래하는 행위는 영화감독의 상상 속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처럼 언론 자체가 실제 테러보다 더한 테러를 가하고,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선정적으로 호객행위를 한다. 우려되는 것은 언론이, 눈길을 끌어야 성공한다는 ‘주목의 경제’(attention economy)를 따르다 종종 사태의 본질을 놓친다는 점이다.

2007년 태안 원유유출 사고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은 해안가에서 검은 기름을 닦아내던 100만 자원봉사자를 떠올린다. 또 97년 외환위기와 관련해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자발적 금 모으기 운동에 주목한다. 그러나 언론이 이런 자원봉사와 캠페인 같은 것을 집중 조명하다 보면 종종 사태의 원인을 호도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외면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언론이 ‘위기 속에 꽃핀 희망’을 전달하는 동안 정작 문제를 일으킨 책임자는 숨어버리고 비용은 사회 전체로 전가된다. 비슷한 위기가 반복되는 이유다.

언론은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을 구성한다. 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쓰는 만큼, 겸손할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언론이 구사하는 말들은 갈수록 독해지거나 경박해지고 있다. ‘낚시 기사’ 감시 사이트 <충격고로케>가 ‘충격’과 ‘경악’의 의미를 ‘독자에게 부디 클릭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거나 독자를 낚아보기 위해, 언론사가 기사제목에 덧붙이는 일종의 주문’이라고 다시 정의할 정도다. 우리 언론의 현실이 ‘알고 보니’ ‘헉’ 수준밖에 안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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