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세라 기자

▲ 박세라 기자
얼마전 본방송을 놓친 프로그램을 주문형비디오(VOD)로 보려고 TV를 켰는데, 프로그램 목록을 살피던 중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여기저기 살폈지만 도저히 해결이 안 돼, 수신기에 붙어있는 수리(AS)센터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정말 친절하고 상세하게 해결책을 알려줬고, 덕분에 다시 TV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이래서 업계 1위 기업이구나”하고 감탄하며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그 직원은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에 노동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한밤의 ‘감동서비스’에 대해 보상은 제대로 받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남들이 쉬거나 자는 시간에 일해야 하는 서비스센터 직원에게 특별히 마음이 쓰였던 것은 그 일이 대표적인 비정규직종의 하나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97년 외환위기 이후 ‘값싸게 쓰고,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대거 늘리면서 열악한 근무조건과 차별적인 대우를 참아야 하는 ‘2등 노동자’의 설움이 산업현장 곳곳에서 쌓이고 있다고 한다. 경영이 불안정한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연간 10조원 가까운 순이익을 내는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도 ‘비용절감’을 이유로 정규직이 하던 일을 비정규직에게 넘기고 있다. 그것도 ‘직접 고용하라’는 법원의 판결까지 외면하면서. 얼마전 ‘위장도급’ 시비를 빚었던 삼성전자서비스의 경우도 수리기사들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에 쫓기며 낮은 처우와 혹독한 근무평가에 시달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 삼성전자서비스는 하청업체 직원들의 업무를 직접 지시감독하고, 인사기록을 관리해 도급을 위장한 '불법파견'이라는 논란을 불렀다. ⓒ KBS 화면 갈무리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보수는 정규직의 절반 남짓에 불과하고, 식당과 직원버스 이용 등 사소한 혜택에서도 차별당하고, 언제 해고될지 몰라 늘 불안한 비정규직노동자가 그 회사에 대해 높은 충성심을 갖고 창의성을 발휘하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하청업체에 도급을 준 것처럼 계약을 해놓고 실제 작업감독은 원청업체가 하면서 ‘강도 높은 노동과 인색한 보상’을 당연시하는 ‘위장도급’도 노동자의 자긍심과 근로의욕을 떨어뜨린다. 노동자를 쥐어짜서 비용을 줄이면 회사는 장부상 이익이 늘겠지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결과가 빚어질 수도 있다.

한때 ‘품질’의 대명사였다가 세계적인 불량부품 리콜 사태로 명성이 크게 추락한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예를 보자. 도요타는 오랫동안 종업원의 권익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경영으로 낮은 불량률 등 최고의 품질을 기록하며 세계정상으로 발돋움했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영기조로 전환한 뒤 비정규직 고용을 대거 늘리면서 대규모 리콜사태를 반복하는 지경까지 갔다. 고용불안 속에 충성심과 책임감이 약해진 노동자들의 근무기강이 전과 달리 크게 해이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노동자를 존중하고 기업의 동반자로 생각할 때 기업의 경쟁력도 높아질 수 있으며, 노동을 단순히 절약해야 할 ‘비용’으로만 생각하면 기업의 가치도 함께 추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요타가 보여준 셈이다.

▲ 도요타 자동차는 호주에서 크라운·렉서스 등 차량 7종을 리콜한다는 계획을 일본 국토교통성에 신고했다. 도요타는 지난 2010년 1월에도 미국에서 가속페달 결함 차량 230만대를 리콜했다. ⓒ KBS 화면 갈무리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기업들에게 도요타를 반면교사로 삼는 각성이 필요하지만, 행정·사법·입법부 등 우리 사회 공적 기구들이 제 역할을 하는 것도 절실하다. 고용노동부는 정당성이 없는 비정규직 남용이나 위장도급 등을 통해 노동자를 차별하고 착취하는 악덕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적발하고 제재해야 한다. 사법부는 기업과 기업인의 범법 행위에 비교적 온정적이었던 관행에서 벗어나 불법행위를 일삼는 기업들을 엄벌해야 한다. 국회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잘 지켜져 비정규직 남용이 억제되게 하는 등 노동자보호를 위한 정교하고도 현실적인 입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정당하게 보상함으로써 ‘신바람 나게 일하는’ 현장을 만드는 것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경제 발전도 촉진하는 길임을 모두가 깨닫고 실천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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