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사회교양특강] 이종현 가천대 교수
주제② 경제민주화 담론의 재구성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은 민주화한 자본주의 국가가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권위주의 국가에 저항해 시민의 이름으로 얻은 민간영역은 결국 자본의 운동장이 됐다. 이후 공룡처럼 커진 자본은 재벌의 이름으로 관료기구를 포획하고 시민까지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이종현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사회교양특강’에서 신자유주의 도입 전후 상황을 설명하며, 우리나라 경제민주화 담론의 역사적 흐름을 재구성했다.

“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은 그동안 시대가 바뀔 때 서구에서 여러 차례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격은 매번 바뀌어서 지금에 이르게 됐죠. 20세기 광풍처럼 밀려들어온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 경제민주화 담론의 변화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강한 권위주의 국가의 품에서 성장한 ‘재벌’

현재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공공 부문을 줄인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저항의 역사로 기록된 1970~80년대는 자유주의가 충분히 ‘진보’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국가의 영역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부의 개입을 줄이면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이 교수는 1970년대 한국 상황을 “박정희 정부라는 강한 권력 아래 자본을 대표하는 재벌과 대중인 시민이 동시에 통제받던 체제”라고 말했다.

권위주의 정부를 오랜 기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적 탄압뿐 아니라 설득과 회유도 필요했다. 당시 정부가 통제하던 주 대상은 국가에 대항하는 시민들이었고, 자본에 대해서는 ‘하급파트너’의 지위를 부여했다.  재벌에 자금을 투자하고 각종 혜택을 몰아주며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을 진행했다. 한국 기업의 은행보증이 해외에서 ‘국가보증’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자본은 정부와 영합해 국가의 품속에서 한 몸처럼 성장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권위주의 정부 의 보호와 지원 속에서 자란  재벌도 몸체가 커지면서 국가에 대한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들 역시 시민만큼이나 국가를 불편해했다”고 설명했다.  

▲ 한국 경제민주화 담론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이종현 교수. ⓒ 임종헌

‘정부’를 타격 대상으로 삼은 경실련의 오류

1980년대 들어오면서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독재․반정부 투쟁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났다. 1989년 시민의 측면에서 권위주의 정부에 대해 반기를 든 최초의 자유주의 운동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라는 시민운동단체가 등장했다. 경실련은 서경석 목사를 대표로 ‘공정한 시장경제질서와 경제정의의 안정적 유지’를 내걸며 개혁을 주장했다. 이 교수는 당시 경실련에 대해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갈등의 요소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실수를 범했다”고 평가했다.

경실련이 생기기 직전인 1986년에서 1988년 사이, 한국 경제는 엄청난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단군 이래 최호황기’를 누렸다. 부동산 값이 폭등하면서 전세 자금이 없어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기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분당, 일산 등에 주택 공급을 늘리는 방식으로 가수요를 해결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경실련은 한국 사회의 갈등을 ‘불로소득 대 근로소득’이라는 현상적 요인으로  설정했다.  

“부동산 문제가 생긴 것은 순환의 문제이기 때문에 경제 하강기에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경실련은 순환적 문제를 구조적 문제로 설정하면서 갈등의 원인을 잘못 정의한 것이죠.”

경실련의 설정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도 생산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근로소득자에 속한다.  다만 부동산투기와 같이 불로소득을 얻는 측면만 제거하면 된다. 그러나 당시 한국경제는 시장경제가 성장․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노동자-자본가 사이의 갈등 등 기본적인 계급 문제가 본격적으로 표출되던 시기였다. ‘근로소득자’ 사이의 갈등이 사회문제의 핵심 축으로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부동산 소득자, 임대 소득자들을 설정한 것은 초점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경실련이 자유주의 운동을 시작하면서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현실적 토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경실련은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며 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를 주장했고 한국은행의 독립에 대해 목청을 높였다. 이 사안들은 경제정의의 일반 수칙이라기보다는 각 사회가 여건에 맞게 적절한 수준을 합의해 나가야 하는 사안에 속한다. 결국 경실련의 자유주의 운동은 현실적으로 국가 권력의 축소와 시장확대에 초점을 맞추었고 경제정의 역시 그 조건 아래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 측면에서 또 한번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은 것이었다.

“군사정권이긴 했지만 이미 ‘물태우 정권’이라고 부를 만큼 국가가 유연해진 상황에서 시민 사회는 자유주의와 대치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시민의 이름으로 국가를 타격해 확대한 민간(시장) 영역은 결국 자본이 점령해 재벌들의 운동장이 되고 만 것이죠. 권위주의 국가의 힘이 약화된 대신 자본의 힘은 강화됐습니다.”

참여연대도 개혁이란 이름으로 ‘국가’만 조준

경실련이 정부를 타격하는 데 힘을 쏟는 동안 재벌에 대한 규제는 점점 느슨해져 사회에 부작용을 낳았다. 경실련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1994년 이보다는 다소 진보적인 입장을 표방해 일명 ‘좌실련’이라 불린 참여연대가 발족했다. 참여연대는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사회’를 슬로건으로 삼고 개인의 권리나 인권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 교수는 “참여연대가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했다. 장하성 교수 주도로 1997년부터 활발해진 소액주주운동은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되찾음으로써 대주주의 횡포와 자본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삼성, 현대, SK 등 재벌들은  2~3%에도 못 미치는 지분으로 사실상 그룹 100%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 경영구조를 소액주주들의 권한을 강화해 막아보자는 것이 소액주주운동입니다. 자본의 움직임을 다른 자본이 견제할 경우에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죠. 하지만 가진 만큼 권리를 행사하자는 자본주의 원리가 부상하면서, 노동이나 계급 같은 문제는 논의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경제민주화의 관점에서 참여연대의 운동은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재벌이 적은 지분 가지고 전체를 지배하는 ‘봉건적 억압’이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권리라도 지키자고 주장한 것은 분명 진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용은 ‘자본주의 근대성’을 지켜달라는 수준의 요구사항일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또 위기가 오면 국가가 세금으로 도와주는 행태가 반복된 한국 자본 축적의 역사로 볼 때 ‘가진 만큼’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교수는 1972년 박정희 정부가 내렸던 ‘8•3 사채동결조치’를 예로 들며 설명을 이어갔다. 1960년대 말 세계 경제 침체로 가발, 속옷 등의 수출이 대부분을 차지한 우리나라 경공업도 타격을 받았다. 1970년대 초 많은 기업이 부실화하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하게 되자 기업들은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려 모면하려 했지만 상황은 더 악화됐다.

“당시 중산층, 기업 모두가 민간금융인 사채시장에서 돈을 운용했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기업들은 사채가 기업부실의 원인이라며 정부에 사채동결조치를 요청했습니다. 정부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기업들은 빌린 돈을 신고하기만 하면 몇 년 동안 유예기간을 두고 낮은 금리로 상환할 수 있게 됐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소시민들은 기업에 빌려준 돈을 떼이고 강제로 지불유예를 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8.3 조치는 국가가 국민의 재산권을 동결시키고, 국민 돈으로 재벌 빚을 갚아준 꼴이 된 겁니다. 이처럼 국민 자금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가진 만큼’ 행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걸까요?”

이 교수는 나중에 해외 자본까지 끌어들이게 된 소액주주운동에 대해 방법론적 오류가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구한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에 빗대면서 조선의 개화를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였지만 과연 일본의 목적도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개혁이었겠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 교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으로 끝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해외 자본과 관계설정에서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소액주주운동보다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해외자본의 이용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렇지 않아도 고조돼 있는 반외자 민족감정을 자극해 문제가 있는 국내 자본까지 민족의 보호망으로 가려주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또 “참여연대는 재벌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국가 부문의 적극적인 기능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공공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공공부문을 향한 문제제기 중심의 운동방식은 결과적으로 대중들로 하여금 국가와 정치를 혐오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아쉬워했다.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사회에서 참여연대의 개혁운동은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의 공공성도 확보하지 못한 채 ‘개혁이란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속화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 이전과 이후 재벌-국가-시민사회의 관계. 국가의 권위가 축소되고 재벌 영역이 확대됐다.

신자유주의, 민족주의 맞물리며 ‘재벌’ 덩치 키워

1990년대 신자유주의 조류를 급격히 받아들인 이후재벌-국가-시민사회의 관계는 새롭게 바뀐다. 정부의 역할은 줄고, 자본의 영역이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재벌이 정부까지 포획한 것이다. 언론 역시 이 영역 아래 포함돼 자본의 관리를 받는 구조에 이르렀다. 이 교수는 “이것이야말로 민주화한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비극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1997년 이후의 흐름을 이야기하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장하준 교수가 관여한 ‘대안연대회의(이하 대안연대)’를 언급했다. 대안연대는 소액주주 운동을 신자유주의적 주주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주주만이 아니라 노동자나 지역주민, 소비자 등 다양한 주체를 개혁의 주체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사민주의적 주장이 힘을 얻게 됐는데, 이는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제도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위기를 겪으며,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이 교수는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며, “구국을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소유한 금을 쏟아내면서 세계 금값을 들썩이게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때 IMF로 표상되는 외국 자본이 대중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면서, 외자로부터 핍박받는 우리 자본을 구하자는 ‘반외자 친내자(反外資 親內資)’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본의 국적성 논쟁이 더해지면서 재벌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민족주의적 옹호가 심화된 것이다. 대안연대는 이런 경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외자와 내자의 문제에서 내자가 더 낫다고 주장했지만, 내자가 국내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닫고 있었습니다. 한국 자본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는 인식은 상당히 결여됐다는 것이죠. 지금이라도 타협하면 될까요? 이미 자본이 엄청나게 커진 상황에서 타협은 쉽지 않을 겁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정책 내용으로는 진보라기보다 단지 자유주의 정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면서 “경실련의 많은 전문가들이 정책 참모로 들어간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 IMF에 의해 발생한 위기와 문제의 대부분은 ‘노동’에 전가됐다. 자유주의적 경향은 노무현 정부 이후 더 심화돼 참여정부는 스스로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책의 무게가 신자유주의 쪽으로 더 기울어진 것이다. 이 교수는 “한미 FTA가 노무현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추진된 것이 단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노무현 정부 때 IMF 구제금융 위기의 원죄를 진 재벌에 오히려 날개를 달아 주고, 거꾸로 재벌의 세상이 되도록 만든 점에 대해서도 꼬집었다. 이 교수는 “재벌의 문제는 IMF 위기 이후 거의 삼성 문제로 압축된다”며 “참여정부가 삼성에 면죄부를 주면서 민주사회가 힘 있는 재벌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를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1987년 박종철 사건과 2007년 김용철 사건의 공통점

▲ 삼성그룹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이 5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 관리해왔다고 폭로했다. ⓒ 시사인

이 교수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1987년의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을 흔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비교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해 고문하다가 죽게 만든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됐다. 당시 목숨을 걸고 공안당국의 박종철 사인 조작을 폭로한 주체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

김용철 변호사 역시 과거 군부 정권처럼 경제권력을 쥐고 있는 ‘삼성’에 저항했다. 하지만 정부 도 좌지우지하는 삼성의 비리에 대해 폭로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20년이 지난 2007년에도 ‘정의구현사제단’뿐이었다. 김용철 변호사 폭로는 박종철 사건 때처럼 종교단체 신부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이 교수는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라며 개탄했다. 한 내부고발자의 폭로는 삼성의 지배구조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침묵했다. 오히려 ‘떡값 검사’로 지목된 인물을 검찰 최고위직에 임명함으로써 모두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 교수는 “삼성과 한국 민주주의의 갈등적 관계는 그때 정상궤도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며 "이것이 이른바 진보 정권의 한계”라고 지목했다.

“삼성을 겨냥한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은 마치 번개처럼 다가온 희대의 ‘국가적 사건’이었습니다. 재벌이 힘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이 어떤 부조리를 발판으로 성장했는지 고발하고, 민주 사회가 그 부조리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한때 조직에 충성한 최측근 내부 고발자가 비리의 핵심을 고발했는데도 그 기회를 의미 없이 날려버린 정부를 개혁의 계열에 놓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재벌도 국민으로부터 규제받아야 ‘민주사회’

이 교수는 재벌에 대한 몇 가지 관점을 소개하며 “경제민주화 담론은 민주사회의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재벌이라는 커다란 권력집단이라 하더라도 “대중에 의한 규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재벌들은 그런 원칙 자체를 관리하는 구조이며, 민주화한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재벌 문제를 법적으로 건드리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최근 ‘이마트의 직원 사찰 문제’를 사례로 들며, “근대사회가 확보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파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마트 직원 사찰 문제는 올해 4월, 2011년 이후 복수노조 시행이 가능해지면서 이마트 사측에서 노동조합을 개설할 법한 직원들을 사찰하고 부당해고 한 사건이다.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국이나 미국에서조차 기업이 해체될 정도로 기본 원칙이 훼손된 사건이었음에도, 한국에서는 경미한 처벌 정도로 사건을 종결하려 한다”며 왜곡된 현실을 질타했다.

이 교수는 또 성장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는 일부의 입장에 대해 “일부 진보에서 주장하는 ‘성장 없는 경제민주화’는 다시 재래식 화장실로 돌아가자는 것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려면 성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불평등할수록 ‘성장동력’인 인간의 능력은 줄어

그는 “성장동력을 잃어버릴 만큼 한국 사회는 어마어마한 위기 상황에 빠져있다”고 진단했다. 사회가 불평등할수록 극단적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높은데,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나 갑을관계 등의 모습이 모두 불평등의 증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기를 위기로 느끼는 센서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부당한 갑을 관계, 극심한 양극화 등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속하는 사람, 곧 인적 자본이 움직이지 않으면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효율성, 생산성, 창의력은 자본이 아닌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대부분 인간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성장동력도 나오지 않습니다. 경제민주화 담론의 핵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민주화 담론의 재구성은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현실에 토대를 둔 논의여야 한다. 지나치게 권력화한 ‘재벌에 대한 합리적 규제’가 그 출발점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생각이다.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할 때, 민주화한 자본주의 국가의 ‘비극’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의 지식인 평균, 기자 만나면 알 수 있다’

▲ 언론인을 꿈꾸는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학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 임종헌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언론인의 고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언론도 자본의 ‘관리’로 인해 매우 어려운 국면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실을 과장하지 않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며 “진보적 언론이든 보수적 언론이든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호도하지 않는다면 이성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장을 점차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일경제> 기자로 출발해 런던특파원과 부장까지 역임한 경력이 있는 이 교수는 “지식인으로서 언론인도 사회와 사안에 대해 자기 견해를 갖는 것은 좋지만, 언론인의 논의는 명백하게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있는 걸 없다고 하는 새빨간 거짓말은 요즘 같은 세상에 금방 탄로납니다. 하지만 작게 얘기해야 할 것은 크게, 크게 얘기해야 할 것은 작게 말하는 것은 아주 교묘한 거짓말이죠. 요즘 언론의 왜곡보도는 대부분 여기에 해당합니다. 진짜처럼 믿게 만드는 고도의 거짓말이지요. ‘어떤 사회의 지식인 평균 수준은 기자를 만나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자야말로 한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 집단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한국사회 지식의 수준을 대표할 만한지 늘 성찰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사회교양특강>은 김현대, 박상훈, 전중환, 유시민, 김동춘, 이종현, 홍기빈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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