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유선희 기자

▲ 유선희 기자

흡혈박쥐는 날카로운 이빨로 소나 말과 같은 큰 동물의 살갗에 미세한 상처를 낸 뒤 몰래 피를 빨아먹는다. 흡혈박쥐들은 밤에 활동하는데, 워낙 신진대사가 빨라 사흘 밤만 피를 먹지 못하면 죽는다. 어린 박쥐들은 쉽게 공격대상에게 들켜 ‘사냥’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기 때문에 생존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흡혈박쥐 공동체에는 피를 나눠 먹는 풍습이 진화했다고 한다. 그들은 친족이 아닌 박쥐에게도 피를 먹이는데, 특히 과거 자신에게 피를 나눠준 박쥐에게 피를 토해 먹이는 행동이 관찰됐다.

동물학자인 제럴드 윌킨슨은 흡혈박쥐 연구를 통해 ‘이타행동’의 원리를 설명했다. 사나흘만 굶어도 죽는 흡혈박쥐가 평균 15년을 사는 이유는 바로 ‘호혜성 이타주의’ 행동 덕분이라는 것이다. 윌킨슨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 사회에서도 남을 돕는 이타적 행동이 도움을 받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 모두에게 이롭게 작용한다는 원리를 강조했다.

흡혈박쥐 세계에서 호혜적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신뢰’ 덕분이다. 내가 상대를 도우면 언제가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돼 기꺼이 서로 피를 나눠주는 것이다. 국가의 울타리 안에 사는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 역시 이런 호혜적 생태계를 구현하려는 것과 같다. 세금은 소득에 따라 누진 과세되는 경우가 많으니 고소득층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부담이 돌아간다. 덕분에 저소득층은 자신의 수입만으로 시장에서 살 수 없는 복지서비스 등을 누릴 수 있다. 이른바 ‘부의 재분배’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지 혜택 등으로 삶이 나아진 다수의 저소득층은 전보다 많이 소비할 수 있게 되고 이는 다시 내수활성화와 세수 확대로 이어져 사회 전체적으로 선순환구조를 만든다.

문제는 이런 원리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호혜적 생태계 만들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내 주머니를 먼저 열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우리 사회, 특히 고소득층에 만연해 있다. 세금을 공평하고 엄정하게 걷지 않는 국세청, 예산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쓰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불신도 이런 이기주의 풍토에 한 몫 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조세회피처 사건은 그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만들어 탈세한 혐의가 있는 기업인·정치인 등을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폭로했을 때 탐사전문매체 <뉴스타파>는 이 중 한국인도 250여명이 포함됐음을 밝혀냈다. 대부분 재벌일가와 기업임원 등이어서 ‘세금 정직하게 내는 사람이 바보’라는 속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 <뉴스타파>는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를 통해 현재까지 10번째 한국인 명단을 발표했다. ⓒ KBS1 갈무리 화면

박쥐의 세계든 인간 세계든 호혜적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약속을 어기는 사기꾼을 찾아내 벌주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호혜적 공동체가 되려면 탈세를 일삼는 개인과 기업을 찾아내 엄단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만든 기업과 개인에 대해 경위를 따지고, 탈세목적이 분명하다면 세금추징은 물론 형사적 책임도 물어야 한다. 조세회피처 거래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그에 대한 입증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워야 한다.
 
1920년대 미국의 ‘지하경제’를 주름 잡던 ‘전설의 갱’ 알 카포네는 미국 정부와 검찰, 경찰도 어쩌지 못한 두통거리였으나 1931년 연방소득세법 위반혐의로 기소돼 1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세금 떼먹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던 미국인들이 탈세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에 놀라 밀렸던 세금을 앞 다투어 납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알 카포네 효과'라는 말까지 생겼다. 미국은 지금도 탈세범에 대해서는 가혹할 만큼 강력하게 처벌한다. 우리가 참고할 만한 얘기다.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은 호혜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역외탈세의 실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엄벌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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