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홍우람 기자

▲ 홍우람 기자

“저 높은 종탑 위에 천막이 있는 것에는 뭔가 뜻이 있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천막이 있을 리 없다고. 천막이 있다면 누가 일부러 천막을 친 거야. 종탑 위에 천막을 치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저기 ‘사람’이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저기 사람이 있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뭔가 말하려는 거야. 뭔가 말하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나더러 그걸 알아달라는 이야기지.”

‘곰돌이 푸’가 2일 농성 2021일, 종탑 고공농성 147일을 맞은 재능교육 노조의 복직투쟁을 보았다면 저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는 이유는 꿀벌이 있기 때문이고, 꿀벌이 있는 이유는 꿀을 만들기 위해서다. 꿀을 만드는 이유는 먹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라는 곰돌이 푸.’ 서두는 우리나라에서 만화영화로 더 유명한 1926년 영국 작가 앨런 밀른이 발표한 동화 <위니 더 푸>의 한 장면을 변주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곰돌이 푸의 태도다. 작품 속 푸는 자연과 세상을 의미와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바로 ‘목적론’적 사고방식이다.

스위스 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아동의 인지발달을 연구하면서 2~7세 아동이 목적론적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엄마, 하늘은 왜 파란 거야?”, “달은 왜 밤에 떠?”라는 식의 질문을 쏟아내며 부모를 귀찮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적론적 사고는 유년기 어린이들 정서적 교감 능력의 원천이다. 한 세기 동안이나 전세계 어린이들이 <위니 더 푸>에 열광한 것도 결국 자신들이 곰돌이 푸였기 때문일 터이다.

어디 어린이뿐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근거를 목적에서 찾았다. 정의란 사회적 행위의 목적과 본질, 즉 텔로스(Telos)에 따라 달라진다.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우선 해당 재화의 텔로스를 따져야 한다. 예컨대 최고급 플루트는 좋은 연주에 사용되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최고급 플루트는 최고의 연주자가 가져야 한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 식 정의다. 그가 주장한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동화 속에서 꿀을 가장 좋아하고 잘 먹는 곰돌이 푸가 꿀을 얻는 이유와 같다고 할까?

▲ 복직투쟁 2000일이던 지난달 11일 밤. 재능교육 노조는 혜화동성당 종탑에서 147일째 고공농성 중이다. ⓒ 홍우람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사회는 어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대표적인 예가 학습지 교사, 화물차 운전자, 택배 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업주에게 임금을 받아 생활하지만,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나 위탁계약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지난 2008년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도 사측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단체협약을 파기하면서 해고됐다. 성당 종탑에 올라 주목받은 오수영, 여민희씨를 포함한 해직자 12명은 10년 이상 아이들을 가르친 노련한 학습지 교사들이었다. 이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고, 비어있는 일자리로 돌아가는 게 바로 정의가 아닐까?

거꾸로 생각해보면 정의가 상실된 이유는 목적론적 사고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지능력이 발달한 아동은 더 이상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해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른이 되면서 이성을 얻는 대신 정서적 교감 능력을 잃는다. 종탑 위 노동자를 보고도 무심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이 많은 건 그 때문이 아닐까? 곰돌이 푸와 같은 정서적 교감이 아쉽다. 노동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들을 노동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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