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일규 기자

▲ 박일규 기자
‘병든 사회가 아이를 범했다.’ 작년 나주 성폭행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었다. 병든 사회의 원인 중 하나로 PC게임을 꼽았다. 신문은 피해자의 어머니와 범인이 밤새 PC게임에 몰두했다고 보도했다. 피시방을 돌아다니는 범인의 사진도 실었다. 게임은 학교 폭력의 원인으로도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경산 중학생 자살 사건을 다룬 기사에는 가해학생들이 게임에 몰두했다는 언급이 반복해서 나온다. 피해학생에게 온라인 게임에서 앵벌이를 시켰다는 기사도 보인다. <조선일보>는 신조어 ‘빵셔틀’의 셔틀이 게임에서 나온 말이라는 이유로 게임을 학교 폭력의 주범으로 몰았다.

게임 등급판정은 지금까지 게임물등급심의위원회에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 추가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만16세 이하 청소년은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하는 ‘셧다운제’는 이미 시행되고 있다. 교육과학부는 국회에 상정되지 못했지만 일정 시간 이상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하는 ‘쿨링오프’제를 추진했다.

게임 규제를 주장하는 쪽은 건전한 게임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몇 규제는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여성가족부의 ‘청소년 인터넷게임 건전 이용제도 고시 제정안’에는 온라인 게임의 강박성을 측정하는 항목으로 ‘게임을 하면서 같이 하는 팀원들과 함께 무엇을 해나간다는 뿌듯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게임’이 있다. 게임의 폭력적 내용뿐 아니라 협동의 기쁨까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한 교수는 간담회에서 게임에 대한 ‘성전’에서 이겨야 한다고 발언했다. ‘성전’(지하드)이라는 종교적 단어를 보면 교수가 게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회의적이다.

도덕을 앞세운 문화 규제는 유서가 깊다. 80년대까지 불량만화 추방 캠페인을 벌이며 어린이날에 만화를 불태웠다. 건전문화 육성을 명목으로 가요, 영화, 소설도 사전검열을 했다. 실상은 독재와 부패가 만연했고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수영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읊었던 것처럼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사회였다. 게임의 죄를 묻는 것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주요 언론에서 게임에 대해 진지하게 다룬 적이 있던가? 이제 와서 게임을 사회 문제의 근원처럼 여기는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 주장처럼 게임은 무조건 폭력적이지도 않다. 여성가족부에서 제시한 기준만 보더라도 분명 협동과 같은 긍정적 요소가 들어있다.

어떤 면에서 게임은 현실보다 공정하다. 한 예로 대부분 게임에는 '고레벨'들이 초보자를 괴롭히지 못하게 방어하는 초보자 전용지역이 있다. 회사로서는 신규 이용자가 게임 세상에 안착해야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앵벌이’나 ‘빵셔틀’은 게임 자체의 특성이 아니다. 영화 <친구>가 인기를 끌 때는 ‘시다바리’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게임이 아나라 학생들의 잘못된 문화이다.

게임 중독에 대한 기사도 과장됐다. 게임에 이상한 장치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게임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게임을 오래 하면 건강에 유의하라는 경고가 뜬다. 오히려 취미생활조차 즐길 수 없는 경쟁사회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늦은 밤까지 학교나 학원에 붙잡혀 있는 학생, 매일같이 야근하는 직장인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는 별로 없다. 다행히 초고속 인터넷이 잘 발달해 온라인 게임이나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값싸게 즐길 수 있다. 나주 성폭행범도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였다. 그는 게임을 많이 해서 정신이 병든 게 아니다. 애초에 게임밖에 할 게 없는 열악한 처지였다.

게임에 분노를 쏟아내면 속은 후련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이버 세상을 백날 건드려봐야 현실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 게임을 규제한다고 해서 학교 체면만 생각하는 교사들의 안일한 태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범죄자가 가정집에 들어올 정도로 부실한 치안을 개선할 수 없다. 오히려 게임을 비난하느라 정말 중요한 문제들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을 위험성이 크다.

조지 오웰의 <1984>에는 '2분간 증오'라는 의식이 있다. '증오'가 시작되면 스크린에 국가의 적들이 나온다. 화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적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하다 ‘빅브러더’를 외친다. 물론 분노는 억압받고 감시당하는 환경을 바꿀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게임에 대한 생각은 '2분간 증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분노가 진정 사회를 병들게 하는 ‘빅브러더’나 왕궁의 부패를 처단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네 죄를 알렸다’는 식의 단죄로는 정의를 세울 수 없다.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