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혜영 기자

▲ 김혜영 기자
지하철을 탔다.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노인에게 욕을 한다. 혹은 그 반대 상황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대부분은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모른 척한다. 아니면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렇게 촬영한 동영상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여주거나 자신의 SNS에 올릴지 모른다. 제목은 '지하철 패륜녀' 정도? 그러면 얼마 안 돼 댓글이 주르륵 달린다. "쯧쯧...요즘 세상 참 말세네요." "이 뒤로 어떻게 됐나요? 주변에 말리는 사람은 없었나요?" 등…… 그 동영상은 한동안 화제가 된다.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공경과 예의가 사라진 사회를 성토하든지, 방관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다수를 비난하든지, 이내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의는 여기까지만 작동한다.

지난 2010년 출판돼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00만부를 돌파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의 '정의집착' 현상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진실은 밝혀진다' 또는 '정의는 승리한다'는 식의 메시지를 담은 드라마와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고,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마저 '리얼'과 '진정성'이 대세가 됐다. 총선과 대선이 치러진 지난해에는 '공정사회' '정의구현' 등의 기치가 지루할 정도로 남발됐고, 상대적으로 '정의'로워 보이는 안철수에게 상당수 국민이 기대를 걸었던 것도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정의를 외쳐온 지난 몇 년간 세상은 얼마나 정의로워졌을까? 착하고 진실되게 살아온 사람들은 복을 받고, 나쁘고 교활했던 사람들은 벌을 받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인간답게 살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망루에 올라 불타 죽거나 떨어져 죽었고, 평생을 살아온 땅을 지키고자 한 노인들이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 세상이 됐다. 파스칼은 <명상록>에서 말했다. "힘을 갖지 못한 정의는 무력하다. 우리는 정당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가 없어서,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방에 앉아,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로 외쳐댄 정의는 현실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는 드라마의 결말과 달리 현실의 회장 사모님은 아무 죄가 없는 여대생을 잔인하게 살해하고도 검찰과 의사의 도움으로 손쉽게 형집행정지를 받아낸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법조인을 꿈꾸는 이들은 그 꿈을 위해 가족과 친구를 외면하며 일정 시간 인간성을 매몰시켜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굳어진 거대한 시스템을 인정하기에는 뭔가 정의롭지 못한 것 같고, 그렇다고 그것을 외면하기에는 두려운 삶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적어도 방구석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20대 개새끼론'과 다르다. 뒤쳐지거나 소외된 자를 외면하고 나만 앞장서 달려가자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결국 자기비판을 게을리하지 않는 주체적 개인들에게 있다는 말이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깊이 분노한다면 행동해야 한다. 잘못된 시스템을 전복시키려는 발칙한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정의의 판타지'를 경계하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있다’는 착각, ‘결국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책임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위로와 정신적 승리밖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그 판타지는 현실에서 아무 힘이 없다.

영국의 시인 D.H. 로렌스는 시 '제대로 된 혁명'에서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고 했다. 오늘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몇몇의 부도덕함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듯이 우리가 바라는 정의사회 역시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의 노력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세상이 됐다. 반감을 최소화하고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으면서 현실을 개선하는 가장 빠른 길은 행동하는 개인으로 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연대이자 혁명이다.  

난세를 구할 걸출한 영웅은 철학자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만큼 낡은 정의가 됐다. 헤겔 역시 조직과 관료가 정비된 근대국가에 더 이상 시대적 소명을 짊어진 영웅은 등장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 누구도 정의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노인에게 욕을 하는 지하철에서 당신이라면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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